
시계를 약 9년 전으로 돌려보자. 2016~2017 V리그 시상식에서 남자부 정규리그 MVP는 현대캐피탈의 문성민의 차지였다. 2015~2016시즌에도 정규리그 MVP를 차지했던 문성민은 MVP 2연패에 성공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토종거포로서의 입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상식의 가장 높은 곳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팀의 대선배를 바라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프로로 직행해 팀의 막내였던 말라깽이 그 소년은 문성민을 보며 꿈을 키웠다. 언젠가는 저 자리에 서는 날을 위해서 묵묵히 운동화 끈을 조여맸다.

9년이 흐른 지난 14일, 그 소년은 어느덧 20대 후반의 청년이 됐고 자신의 롤 모델처럼 V리그 시상식의 가장 높은 곳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별로 우뚝 섰다. 이제는 현대캐피탈을 넘어 V리그 토종 넘버원으로 거듭난 허수봉 얘기다. 선수 본인은 아직 멀었다며, 더 노력하겠다며 손사래치지만,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은 ‘수봉시대’라는 것을.
허수봉은 지난 14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2024~2025 V리그 시상식에서 남자부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다. 2016~2017시즌 데뷔 후 9년 만에 이뤄낸 쾌거다.
허수봉은 진작에 유망주의 알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군 복무를 마친 이후 치른 첫 풀 시즌인 2021~2022시즌에 602점으로 득점 7위, 토종 1위, 공격종합 5위(52.89%)에 오르며 리그 최고 선수 반열에 올랐다. 2023~2024시즌까지도 허수봉의 존재감을 부인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허수봉에게 딱 아쉬운 것 하나는 팀 성적이었다. 허수봉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점부터 지난 시즌까지는 통합우승 4연패를 달성한 ‘대한항공 왕조’ 치하였다. 올 시즌 비로소 정규리그 1위를 거두며 대한항공의 통합우승 5연패 목표를 조기에 꺾어버리더니 챔피언결정전에선 대한항공을 만나 3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대한항공 왕조를 자신의 손으로 물리쳤더니 정규리그 MVP라는 큰 상이 찾아온 셈이다.

올 시즌 개인 기록도 화려하다. 35경기 126세트에 출전해 득점 4위(574점), 공격 종합 3위(54.13%), 서브 3위(세트당 0.349개)를 기록하며 외국인 선수 이상의 존재감을 뽐냈다.
다만 변수는 있었다. 경쟁자가 현대캐피탈의 통합우승을 함께 일궈낸 주역이자 역대 최고 외인으로 꼽히는 레오(쿠바)였다는 점이다. 레오 역시 득점 2위(682점), 공격종합 4위(52.95%), 서브 4위(세트당 0.346개)로 허수봉에 못지 않은 성적을 냈다.
현대캐피탈의 ‘집안싸움’ 승자는 1표 차로 갈렸다. 기자단 투표 31표 중 허수봉이 13표, 레오가 12표를 받아 1표 차로 허수봉이 정규리그 MVP를 차지한 것이다.
시상식 뒤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허수봉은 “MVP 후보라는 기사가 여기저기서 나올 때마다 개인상은 욕심이 없다고 했는데, 받고 나니 좋다. 레오가 챔피언결정전 MVP를 가져갔으니 서로 윈윈한 것 같다. 다음 시즌에도 레오와 좋은 케미를 보여드리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레오와 1표 차가 갈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허수봉은 수줍게 웃으며 “아무래도 국내선수라는 점인 것 같다”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더 성장할 게 없는 완성형 선수인 것 같지만, 허수봉 본인 스스로는 올 시즌 더 성장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그는 “공격 효율이 좋아진 것 같다. 예전엔 힘으로 세게 때려야만 한다는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걸릴 것 같은 상황에서는 리바운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수비적인 부분에서도 많이 발전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 “2016년 데뷔 후 매년 성장해왔다고 생각하는 데 이번 MVP로 자신감을 더 얻은 것 같다. 매년 더 성장하고 싶다”라고 각오를 드러냈다.

시상식에서 올 시즌 가장 기억나는 경기로 문성민의 은퇴경기였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를 꼽았던 허수봉은 “신인 때부터 성민이형의 보고 배우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형의 현역 마지막을 함께 해서 영광이었다. 성민이형의 제2의 인생도 응원하겠다”라고 대선배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이제 허수봉의 시선은 대표팀으로 향한다. 5월초 대표팀에 소집되어 국제대회에 나선다. 허수봉은 “프로 무대도 중요하지만, 국제대회 성적이 배구 인기에 영향을 끼치기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지난해부터 세대교체로 어린 선수들이 대표팀에 모여서 하고 있는데, 이제는 결과로 보여드릴 때다. 그런 얘기를 이전에도 많이 했지만, 이번엔 진짜 달라야 한다”라고 굳은 각오를 드러냈다. 이어 “지난해엔 팀에선 아웃사이드 히터와 아포짓 스파이커를 병행했지만, 올 시즌엔 아웃사이드 히터로만 거의 뛰어서 대표팀에서도 포지션 적응 시간이 필요없다. 휴가 중이지만, 이미 몸을 만들고 있다. 제대로 해보겠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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