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야당 유력 대권주자 이마모을루
지난달 테러·부패 혐의로 전격 구금
10년 만의 최대 규모 항거로 이어져
시민 대거 체포·외신기자 추방에도
美·EU, 직접 제재 없이 ‘말로만 우려’
“지정학적 가치 탓 소극적 태도” 분석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야권 최대 지도자를 테러 및 부패 혐의로 체포한 것을 계기로 발생한 반(反)정부 시위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10년 만에 최대 규모’라지만 튀르키예 정부의 일관된 강경 진압에다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가 지정학적 가치가 큰 튀르키예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외면하고 있어 동력을 잃어가는 모양새다.
◆시민 2000명 이상 체포… 최대 반정부 시위
2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19일부터 이어져 온 반정부 시위와 관련해 체포된 시민은 2000명 이상이다. 이 가운데 820여명이 기소됐으며, 190여명이 재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시위에 불을 댕긴 것은 지난달 19일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의 유력 대권주자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이 테러와 부패 혐의로 구금된 사건이었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시장이 테러 조직으로 지정된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 쿠르드노동자당(PKK)을 지원했고, 지난해 3월 지방선거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성명을 통해 “내 평판과 신뢰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라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체포 이틀 뒤인 지난달 21일 밤, 30만여명이 거리에 나서 에르도안 정부를 규탄했다. 이스탄불에서 시작된 시위는 수도 앙카라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이 정도 규모의 시위는 튀르키예에서 거의 10년 만이라고 영국 BBC방송은 전했다. CHP는 지난 19일 튀르키예 중부 요즈가트에서 농민들과 함께 ‘트랙터 시위’에 참여하는 등 반정부 여론을 결집해 시위를 이어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에르도안 정부는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지난달 23일 이마모을루 시장의 직무를 정지했고, 같은 날 법원은 이마모을루 시장의 구금을 연장해줬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대한 통제도 강화했다. 강경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점차 힘을 잃어가는 상황이다.

◆에르도안 vs 이마모을루
이번 반정부 시위는 ‘마지막 임기’임을 약속하고도 정적 제거에 나선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항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2003년 3월부터 지금까지 22년 넘게 장기 집권하고 있는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맞설 유력한 정치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사업가 출신으로 2019년 3월 이스탄불 시장선거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소속된 정의개발당(AKP) 후보를 꺾었다. 이 선거는 무효가 됐지만 같은 해 6월 재선거에서 이마모을루 시장은 다시 당선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선거에서 재차 이스탄불 시장에 오르면서 2028년 열릴 대선에서 CHP의 유력 대선 후보로 부상했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이마모을루 시장은 정치 성향, 역사관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농촌 지역이고, 이마모을루 시장은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 대도시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종교·권위·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반면 이마모을루 시장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세속주의를 지향한다. ‘범튀르크주의’로 오스만튀르크 제국 시절의 향수를 자극해 세력 확장에 힘을 쏟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달리 이마모을루 시장은 ‘튀르키예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유지를 강조하며 공화국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CHP는 지난달 23일 이마모을루 시장을 차기 대선 후보로 궐석 선출했지만, 대선 후보 출마는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이마모을루 시장이 체포되기 바로 전날 이스탄불대가 편입 규정 위반을 이유로 이마모을루 시장의 학사 학위를 무효로 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헌법은 대선 출마 자격을 대학을 졸업하고, 유죄 판결 이력이 없는 사람으로 한정하고 있다.
◆국제사회 반정부 시위 외면, 이유는
튀르키예의 반정부 시위로 수천명의 시민이 체포되고 심지어 시위를 취재하던 외신 기자들이 체포되거나 추방되는 등의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EU나 미국 등 국제사회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튀르키예 당국은 최근 이스탄불에서 시위를 취재하려던 스웨덴 언론인 카이 요아킴 메딘을 체포해 모욕, 테러조직 가입 등 혐의로 기소했다. 메딘이 튀르키예 당국이 테러 단체로 지정한 쿠르드족 단체와 시위를 조직·선전하거나 연루된 것으로 확인된 용의자 15명 중 한 명이라는 이유에서다. 튀르키예 당국은 지난달 26일에도 이스탄불에서 시위 상황을 취재하던 영국 BBC방송 특파원 마크 로언을 일시 구금했다가 추방했다.

이에 대해 EU 집행위원회는 튀르키예가 ‘유럽평의회’ 회원국이자 EU 가입 후보국으로서 “민주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직접적인 제재나 조치는 없었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도 튀르키예 외무장관과 통화에서 이번 대규모 시위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나, 공식적인 성명이나 행동은 없었다고 로이터는 보도했다.
국제사회의 뜨뜻미지근한 태도는 튀르키예가 가지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란 분석이 강하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가장 많이 수용하며 ‘난민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 가뜩이나 난민 문제로 사회·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는 유럽 국가 입장에서 튀르키예의 중요성은 클 수밖에 없다.
또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이어지면서 러시아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한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가치는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EU의 입장에선 튀르키예가 행여라도 러시아와 가까워지게 되면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허용할 수 있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 아슬르 아이딘타시바시 연구원은 “EU와 미국이 지정학적인 가치가 커진 튀르키예의 전략적 관계를 우선시하면서 민주주의 가치 수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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