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반가운 소포를 받았다. 정몽원 전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한라그룹 회장)이 집필한 책 ‘한국도 아이스하키 합니다’가 내 앞으로 배달된 것이었다. 책을 잠시 펼쳐 보면서 아이스하키와의 인연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책을 읽다 보니 가물가물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이스하키를 담당했던 1994년 12월22일이었다. 지금도 아이스하키는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아도 되는 비인기 종목이었지만 프로야구 시즌도 끝나고 시간이 있었다. 한라그룹에서 아이스하키 실업팀을 창단한다고 해서 취재를 갔는데 그때 두 번 놀랐다. 창단식 장소가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 연회장이어서 놀랐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핑클이 축하공연을 왔을 정도로 화려했던 것에 또 놀랐다. 프로야구도 그 정도의 행사를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 뒤 한라는 나를 계속해서 놀라게 했다. 정 회장은 아시아리그를 발족했고, 이기는 것이 요원할 것 같았던 일본팀을 꺾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둔 2017년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 2부리그에서 2위를 차지함으로써 자력으로 챔피언그룹까지 올라가는 기적을 낳았다. 현행 승강제 시스템에서는 아시아에서 한국이 유일하게 챔피언그룹을 경험했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은 아이스하키에 공헌한 정 회장의 공로를 인정, 2022년 5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정 회장이 헌액식에 참석하기 위해 핀란드로 가는 비행기에서 승무원으로부터 “한국도 아이스하키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책 제목을 “한국도 아이스하키 합니다”라고 정한 이유라고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외환위기 때 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과정에서도 아이스하키팀을 끝까지 유지했던 정 회장의 하키 사랑을 곁에서 지켜봤다. 쌍방울, 현대정유, 동원증권, 국민생명 등 당시 팀을 창단했던 기업들은 서둘러서 팀을 해체했다.
대한민국은 스포츠를 통해 국제화를 이뤘고 선진국이 됐다. 1988서울올림픽, 2002월드컵축구,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해 단숨에 선진국으로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대한체육회 산하 경기가맹단체를 맡아 이끌며 국제화에 앞장서며 전 세계에 ‘코리아’를 알렸다.
한라그룹이 지난 31년 동안 아이스하키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알린 것은 그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아이스하키는 유럽과 북미에서 최고의 인기 종목 중 하나다.
주말마다 경기장에서 자주 뵙던 정 회장을 최근에는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책표지에 우뚝 서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을 봤다. 아이스하키와 함께한 세월은 어느새 그를 노신사로 만들어 버렸다.
성백유 대한장애인수영연맹 회장·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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