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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동굴로부터의 시선 [유선아의 취미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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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4-24 23:11:39 수정 : 2025-04-24 23: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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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무심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풍경에도 마음이 깃든다면 아마도 이 영화와 닮은 모습이지 않을까. 한국영상자료원은 ‘자연에 깃든 시선’ 프로그램의 첫 영화로 ‘일 부코’를 상영했다. 영화는 1961년 이탈리아 남부의 비푸르토 동굴을 탐사하는 동굴 탐험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무런 정보 없이 본 이 영화를 처음에 다큐멘터리로 착각했는데 그 이유는 영화 초반에 삽입된 기록 영상 때문이다. 이탈리아 방송 푸티지 속에서 카메라맨과 방송인은 리프트를 타고 건물 외벽을 따라 올라간다. 밀라노에 세워진 고층 빌딩 피렐리 타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며 위로 상승하는 카메라는 이 장면 이후 아래로, 아래로 하강한다.

 

1961년에 촬영된 피렐리 타워 영상을 끝으로 영화는 말을 잃는다. 이후의 극영화는 같은 해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을 재현하는데, 앞서 보인 영상 기록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관객이 할 일은 다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인간의 언어 없이도 얼마나 소란스러운지를 느끼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으로 가득한 고산의 초원은 온갖 소리로 한순간도 고요하지 않다. 풀을 밟는 동물의 발소리, 날갯짓, 풀벌레 소리, 소 떼의 호기심 어린 움직임이나 작은 눈짓조차도 이곳을 몹시 분주해 보이도록 만든다. 나귀와 함께 다니는 나이 든 목동은 풍경에서 들려오는 이 모든 생의 소리를 매일같이 보고 들었을 것이다.

카메라는 점차 동굴과 나이 든 목동을 나란히 놓기 시작한다. 탐험대는 동굴의 깊이를 가늠하기 위해 종이를 찢어 불을 붙이고 그것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동물의 발소리마저 충실히 재현하던 영화의 사운드는 이 장면에서 완전히 동굴 시점으로 이행한다. 빗방울보다 무거운 것은 닿은 적 없었을 동굴 내부에 나풀대는 가벼운 종이가 마치 육중한 바위처럼 내벽을 쿵쿵 울리며 떨어지기 때문이다. 탐험대는 동굴 아래로 계속해서 내려가고 동굴은 이를 그저 지켜본다. 동굴이 마치 나이 든 목동의 신체(내부와 외부)인 것처럼 나란히 배치된 장면에서 이 둘은 잠시 평행하다. 그러나 동굴은 유구한 시간 속에서 영원처럼 누인 몸이되, 목동은 유한한 인간의 생을 거스를 수 없는 몸이다.

 

동굴로부터의 무언의 시선은 어쩌면 이 영화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기계적인 눈과 닮았다. 그러나 그 무심함과 렌즈 너머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이 있다.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닿은 탐사대가 조사를 마치고 떠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 자리에 남아 멀어지는 뒷모습을 오래 담아낸다. 동굴학자들이 불빛을 밝혀 잠시 머물렀던 곳은 다시 완전한 어둠으로 둘러싸인다. 한 줌의 빛도, 누군가의 발길도 닿은 적 없던 곳에 있던 시선은 그 자리에 영원토록 머물 것이다. 마음은 어느새 동굴의 시선으로 옮아가 있다. ‘일 부코’는 영속하는 자연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 유한함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들여다보는 감각과 닮았다.

 

유선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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