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자산 투자자 1600만명 ‘훌쩍’
유튜브·텔레그램 등 범죄 무대로 악용
자금세탁·마약 거래 관련 범죄도 급증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 역할 아쉬움
익명성·규제 사각 등 구조적 배경 원인
고수익 기대심리도 표적 가능성 키워
전문가 “금전 넘어 정신건강에 악영향”
거래소 책임성 강화 등 제도 정비 시급
#. 가상자산 투자로 1000만원가량의 손실을 본 김모씨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상담을 신청했다. 며칠 뒤 증권사 베스트 애널리스트 출신이라는 A팀장에게 연락을 받은 그는 “비트코인 반감기가 시작되니 수익을 내야 한다”는 말에 3개월 이용료 100만원의 유료 리딩방에 가입했다. 김씨는 안내받은 링크를 통해 사설 코인 거래소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했고, 리딩방의 지시에 따라 비트코인을 특정 지갑 주소로 전송해 거래 자금을 충전했다. 그러나 A팀장은 선물거래만을 권유했고 점점 연락도 어려워졌다. 환불을 요구하자 A팀장은 ‘입장료 50만원’을 공제한 뒤 7만원만 돌려주고 사라졌다. 김씨는 “영상을 보다가 믿을 만한 곳이라 생각해 가입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였다”며 “나처럼 당한 사람이 주변에 여럿 있었다”고 토로했다.
#. 2020년 가상자산 거래소 고팍스가 출시한 비트코인 예치 상품 ‘고파이’ 투자 피해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2022년 운용사 제네시스 파산으로 약 1000억원의 피해를 낳은 사건이다. 특히 피해자 90% 이상이 1억원 이하를 맡긴 소액 투자자였고, 은행 예금처럼 믿고 가입한 경우가 많다. 2023년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바이낸스가 고팍스 인수 의사를 밝혔지만, 금융정보분석원(FIU)은 대주주 변경 수리를 장기 보류 중이다. 한 투자자는 “고팍스가 금융당국으로부터 허가받은 거래소이고, 은행 예금과 비슷한 수준인 연 5% 보장 상품인 예치 상품에 가입했는데 이후 전 재산을 잃었다”며 “바이낸스가 고팍스를 인수했는데도 금융당국이 인수 수리를 지연하면서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2009년 비트코인 출현으로 ‘가상자산’이라는 새로운 디지털 통화가 등장하면서 전 세계는 금융 혁명을 맞이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거래 내역을 투명하고 안전하게 기록하고, 중개자 없이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금융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탈중앙성과 익명성이라는 장점은 동시에 범죄에 악용될 여지를 만들었다. 가상자산은 자금세탁, 보이스피싱, 마약 거래, 불법 도박 등 각종 범죄 통로로 활용되며 부작용도 급증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가상자산 투자자는 1600만명을 넘어서며 뜨거운 투자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가상자산 투자자들을 노린 사기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유튜브, 텔레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기반 리딩방 사기가 빠르게 확산 중이다. 또 고팍스 사태처럼 ‘제도권’이라는 이름 아래 운영된 거래소마저 투자자 보호에 실패하면서 피해자들은 두 번 울고 있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7월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을 시행했지만 범죄는 더 늘어나며 투자자 보호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결국 가상자산 시장의 성숙을 위해서는 투자자 자신의 경각심은 물론, 제도적 보호 장치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가상자산 범죄 7년 만에 17배로 폭증
18일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가상자산 관련 불법행위로 검거된 인원은 2017년 126명(41건)에서 2024년 2191명(482건)으로 늘어났다. 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지 7년 만에 17배 이상 폭증한 것이다.
가상자산 범죄로 검거된 인원은 2020년 560명(333건)에서 2021년 862명(235건)으로 증가했다가, 2022년에는 285명(108건)으로 줄었다. 그러나 2023년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뒤, 지난해에는 검거 인원과 건수 모두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2020년 218건(439명)으로 최다를 기록했던 가상자산 빙자 유사수신·다단계 범죄 적발이 2024년 39건(262명)으로 줄어든 반면, 가상자산 관련 사기 범죄는 같은 기간 84건(82명)에서 443건(1929명)으로 급증했다는 것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난해 집중 수사나 병합 수사 활성화로 한 사건에서도 여죄를 많이 검거하는 등 피의자 검거 인원과 건수가 크게 늘었다”며 “가상자산 사기사건의 경우 대부분은 가상자산 투자를 빙자한 리딩방 사건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수사기관의 범죄 적발이 늘고 있지만, 피해는 여전히 늘고 있는 추세다.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가상자산 불법행위 피해액 및 피해자 수 추이’에 따르면 2024년 가상자산 불법행위 피해자는 8206명으로 피해액은 1조1109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도 4377명이었던 피해자는 두 배 가까이 치솟았고, 피해액도 1조415억원에서 6%가량 증가했다.
연도별로 보면 2017년 1317명이었던 가상자산 피해자들은 7년 만에 6배로 뛰어올랐다. 피해액은 역대 최대치였던 2021년 3조1282억원 이후 매년 1조원을 웃돌고 있다. 다만, 2021년에는 불법 다단계 조직인 ‘브이글로벌’ 사건으로만 2조2404억원의 피해액이 발생했다.

◆익명성·규제 빈틈… “글로벌 공조 시급”
전문가들은 가상자산 범죄가 끊이지 않는 구조적 배경으로 가상자산의 익명성과 규제 사각지대를 지적한다. 황석진 동국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가상자산은 지갑 간 전송 시 거래 주체를 확인하기 어렵고, 전자지갑 생성도 간편해 범죄자들이 범행 후 흔적을 감추기 쉽다”며 “거래소 해킹 등 직접 침해형 범죄와, 마약·유사수신·투자사기 등 이용형 범죄 모두 가상자산이 범죄 도구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투자자들의 ‘고수익에 대한 기대심리’도 범죄자들의 주요 표적이 되고 있다. 김명주 서울여대 정보보호학부 교수는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이 ‘하룻밤에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일반 투자자들이 고수익 환상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 교수는 “가상자산 시장은 24시간 열려 있어, 금전 손실뿐 아니라 일상과 인간관계, 정신 건강까지 무너질 수 있다”며 “무리한 투자에 앞서 일상의 안전망부터 확보하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금융당국도 가상자산 범죄 대응을 위해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7월 시행된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을 시작으로 올해 하반기를 목표로 2단계 입법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거래소의 책임성과 내부 통제를 높이고, 이상 거래를 조기에 식별할 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트래블룰(자금이동 규칙)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국제 공조도 확대할 방침이다. 트래블룰은 가상자산 전송 시 송·수신자의 신원 정보를 거래소 간 공유하도록 한 규정으로, 자금세탁이나 범죄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가상자산 범죄는 국경과 무관하게 이뤄지는 만큼, 글로벌 수준의 공조 체계와 기술 기반의 대응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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