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전세사기 등 녹여
공동체 가치에 대한 물음
주저하게 되는 보통사람들
7개작 묶은 5번째 소설집
“방이나 집 소재 내 이야기
작게 느껴진 적 많았지만
점묘화로 그린 하늘처럼
‘원경’ 확보돼 간다 실감”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좋은 이웃’에서)
서울 한 아파트 전셋집에 사는 40대 여성 주희는 책임감 있는 어른이자 성실한 교육자로 살아왔다. 독서지도 교사인 그는 서울 변두리 삼십년 된 아파트에 사는 장애 학생 ‘시우’를 가르치며 자긍심을 품는다. 자신을 특별히 따르는 시우를 보며 자기 일을 “교양 팔이나 입시 장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로 여긴다.

주희의 자부심은 돈 앞에서, 이웃의 뜻밖의 삶을 마주하며 흔들린다. 주희네 윗집을 매수해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인테리어 공사를 벌이는 부부는 넉넉잡아 30대 초반밖에 안 보인다. 전세계약 만료를 앞둔 주희 부부는 치솟은 보증금에 발이 묶여 있는데, 시우네는 넓은 신축 아파트에 입주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내심 짐작했던 것보다 시우네의 형편이 훨씬 좋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희는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린 듯한 쓸쓸함에 휩싸인다.
소설가 김애란(45)이 2021년 겨울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단편소설 ‘좋은 이웃’은 또래들과 비슷한 가치와 속도를 공유한다고 여겼던 주희의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광경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표류하는 주택 정책과 헐값이 된 노동의 가치, 요원한 내 집 마련의 꿈. 모든 게 부당하게 느껴지지만, 그보다 주희 부부를 힘들게 하는 건 ‘어쩌면 잘못은 정말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자기 의심이다.
시우네 이사 소식을 들은 밤, 주희는 남편이 버리려고 내놓은 책더미 속에서 뜻밖의 책을 발견한다. 바로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 젊은 날 두 사람이 모두 사랑했던, 내 삶이 힘들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자는 공동체의 윤리가 담긴 책이다. 그 책이 폐지 상자에 담긴 것을 본 주희의 마음속에서 쌓여 있던 말이 폭발한다. 젊을 때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에는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진다고.
김애란이 2022년 오영수문학상 수상작인 ‘좋은 이웃’을 비롯해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발표한 단편 7편을 묶은 다섯 번째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문학동네)를 지난달 펴냈다.
책에는 오늘을 사는 보통 사람들이 마주하는 계급의 감각과 미묘한 마음을 포착하는 장면이 가득하다. 코로나19로 일감이 끊긴 40대 연극배우 ‘이연’이 지인 덕에 ‘사회적 주류’인 대학 최고 경영자과정 동기생들의 파티에 초대받은 저택에서 감지하는 계급의 표지(‘홈 파티’), 값싼 물가 때문에 택한 동남아 여행에서 숙소를 관리하는 현지인 ‘메이드’와의 “노골적인 계급 차에” 쩔쩔매는 소통 실패의 장(‘숲속 작은 집’)이 그러하다.
영업난을 겪는 동네책방 주인 ‘기진’이 대학병원 순례를 위해 상경한 어머니와의 시간을 숙제 치우듯 보낸 후 어머니의 건강검사지를 확인하는 순간(‘레몬케이크’). 오랜 간병 끝에 엄마도, 사랑도, 젊음도 떠나보낸 40대 중반 여성 ‘은미’가 원어민 영어강사 ‘로버트’와 화상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로 나아가는 순간(‘안녕이라 그랬어’)은 시절의 한순간을 포착하는 섬광과 같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단편 ‘빗방울처럼’에는 전세사기로 재산을 잃고, 그 여파로 배우자마저 잃은 ‘지수’가 등장한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슬픔 속에 사는 사람이 도배라는 행위를 한다는 설정은 8년 전 단편집 ‘바깥은 여름’에 수록된 ‘입동’과 같다. 그러나 ‘빗방울처럼’에선 지수의 집을 방문한 외부인이 뜻밖의 선물을 주는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8년 만에 소설집을 묶으며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그의 소설세계는 앞으로 어디로 향해 갈까. 서면으로 만난 작가에게 근황을 묻자 그는 “나처럼 주로 실내에서 작업하는 사람에게도 여름은 고된 계절인데 다른 분들의 어려움은 오죽할까 짐작하며 7월을 나고 있다”며 “해마다 여름이면 폭우에 겁을 먹었던 청년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다.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로 ‘난쏘공’의 ‘신애’를 언급한 적이 있다. ‘좋은 이웃’에서 ‘난쏘공’의 구절을 인용했는데, 오래전부터 계획한 장치인지.
“그렇지는 않다. 다만 평소 운문성과 산문성이 균형을 이룬 소설을 좋아해 왔는데 ‘난쏘공’은 그 둘 모두를 포기하지 않은, 미학성과 사회성이 균형을 이룬 귀한 작품이라 생각해 왔다. 조세희 작가를 직접 뵌 적은 없지만 10여 년 전 제게 전화를 걸어 짧은 격려 말씀을 해주셨던 일을 소중히 기억한다.”
―시우는 화자에게 ‘공동체, 이웃, 연대 같은 말들을 다 믿느냐’고 묻고, 화자가 답을 망설이는데.
“답이라기보다 질문을 공유하는 식으로 이 단편을 썼다. 어느 순간 그 질문 앞에서 주저하게 된 많은 이의 곤경을 그리고 싶었다. 어떤 질문들은 너무 커서 여럿이 나눠 들어야 하니까.”
―전작 ‘바깥은 여름(2017)’에 비해, 이번 책은 상실 이후 삶의 어두운 그늘로부터 멀어져 ‘어른 구실’을 하려 애쓰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읽혔다. 이번 책을 쓰고 엮으며 ‘희망’이나 ‘낙관’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었나.
“‘낙관도 비관도 확실성의 한 형태’라는 리베카 솔닛의 글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그게 더러 우리의 행동을 어렵게 만든다는 말에도. 그럼에도 ‘어른’이란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려는 순간 한 번 더 주저하는 존재다. 다음 세대의 내일을 위해서라도. 마찬가지로 과거 ‘입동’을 쓸 때 아이를 잃고 고립된 부부를 그렸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는 똑같이 도배 장면이 나오되 유족을 위로하는 외부인을 한 명 넣고 싶었다. 그래서 ‘입동’은 유족의 독백으로 끝나지만 ‘빗방울처럼’은 망자의 당부로 끝난다. 부디 살라는, 살아 달라는 부탁으로.”
―양극화, 영끌, 벼락거지, 전세사기 등 최근 한국 사회 키워드가 소설 전반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마찬가지로 최근 주목하는 현상이 있다면.
“이토록 황폐해진 우리에게 슬며시 다가와 따뜻한 손을 건네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 때론 상담사로 어느 때는 친구이자 연인의 얼굴로 인간을 달래주는 AI의 언어와 패턴, 구조, 섬찟함, 가능성 등에 관심이 간다. 이미 많은 작가가 그린 근미래 풍경이나 요즘 이걸 현실로 마주할 때 아득함이 있다.”
―등단 24년차 중견작가가 됐다. 스스로 느끼는 변화가 있다면.
“나이를 먹어가며 천천히 ‘원경이 확보되어 간다’는 실감이 든다. 그게 소설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방’이나 ‘집’을 그린 내 이야기가 작게 느껴진 적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이 덜하다. 같은 이야기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점묘화로 그린 하늘처럼 점점 커질지 모르니까.”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싶은가.
“작업할 때 구체적으로 큰 계획을 세우며 움직이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희미한 충동이나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때가 많고. 그 과정에서 ‘작가로서 뭔가 꼭 잘해보고 싶다’는 바람보다는 반대로 뭐가 잘 안 됐을 때, 실패의 크기가 몹시 클 때조차도 스스로 너무 좌절하지 말고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용기가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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