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실천 통해 좋은 결과 이끌어내야
“나라 다스릴 줄 몰라, 마음으로 그저 어렵게 여기고 있다.”
1400년 음력 11월,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직후 한 말이다. 2년 조금 넘게 재위한 정종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았지만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해 조선은 사병을 폐지하고 정규군 체제로 전환했으나 가병(家兵) 특유의 결속력과 용맹함도 함께 사라졌다. 반란을 막을 중앙 호위군은 강화하되 변방 지휘관의 재량도 되살려내는 군 개혁을 이루어야 했다.

한편 명 태조 주원장 사후 벌어진 ‘정난의 변’(1399)으로 중원은 내전에 휩싸였고, 황제 교체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외교적 난제도 떠안았다. 태종이 실제로 어렵게 여긴 문제는 공신에 대한 처우였다. 목숨 걸고 그를 도운 공신과 외척들은 상응하는 보상을 기대했으나 모두 수용하면 ‘백성이 가족처럼 화합하며 잘 사는 소강(小康)의 나라’라는 그의 꿈은 포기해야 했다.
이처럼 안팎의 난제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태종이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물었던 게 위의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경기도 관찰사 한상경의 대답은 명쾌했다. “지금 전하께서 어려움을 아신다니 우리 동방의 복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실행이 어렵습니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해 조선 개국에도 참여한 한상경의 말뜻은 분명했다. ‘왕 노릇 하기 어렵다’는 ‘서경’의 구절을 단순한 지식으로 여기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만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놀랍게도 태종은 그의 언중유골을 흔쾌히 받아들여 한상경을 재상으로 발탁했고 재위 내내 ‘어렵게 여기는(爲難) 자세’로 국왕의 자리를 지켜갔다.
그 첫걸음은 공신에 휘둘리지 않고 국가 기강을 세우는 일이었다. “권신끼리 무리를 지어 붕당을 만들고 어린아이를 끼워 정권을 좌우지한다”는 폐단을 막지 못하면 군 개혁도 민생 안정도 불가능하다는 게 태종의 판단이었다. 그는 공신이나 외척에게 명예는 주되 정치 개입을 금지했다. 개입 시에는 민무구 형제 사례에서 보듯이 과감히 제거했다.
국가 기강을 세우기 위해 태종은 일의 순서를 정하는 데 집중했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인사였다. 태종은 인사를 잘하면 말도 자연히 순조로워지고, 국가 기강도 바로 설 것이라 믿었다. 특히 그는 ‘강점 경영’과 ‘적소적재’라는 인사원칙을 중시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재는 없다고 보고 각자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려 썼다. “한 가지 재주만 있어도 등용했다”는 사평이 이를 증명한다. 태종은 또한 적소에 적임자를 배치하는 데 집중했다. 재위 중반에는 인재 명단을 책으로 만들어 인사 때마다 상의해 적임자를 선정했다.
흥미롭게도 재위 중반, 태종이 한상경에게 자신의 정치를 묻던 일화가 전해진다. 1412년, 잔치 자리에서 태종은 “왕 노릇 실행이 어렵다던 경의 말을 지금도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한상경이 “시작은 누구나 하지만 마무리하기는 어렵습니다”라며 다시 조언했고, 태종은 거듭 칭찬했다. 직언을 마다하지 않은 신하, 그 말을 실천한 군주의 모습이 놀랍다.
태종은 1416년 “하루도 편한 적이 없고, 하룻밤도 편히 잠든 적 없다”며 임기를 돌아봤다. 그는 가뭄이 들거나 번개가 치면 하늘이 자신의 정치를 꾸짖는 것이라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恐懼修省). 14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넘기며 “이제야 호랑이 등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422년에 그가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사방이 평화롭고, 창고가 가득 찬 나라를 만든 군주”라 평가했다.
“결국 국민은 결과로 평가하니, 좋은 결과를 내려면 그 직위에 맞는 인재를 선정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을 들으며 떠오른 인물이 태종이었다. 결과로 평가받겠다는 그 말이 진심이라면, 태종의 ‘어렵게 여긴 정치’를 꼭 실행에 옮기기 바란다. 성공한 대통령 출현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지상과제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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