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 한정됐던 기존 통념 깨고
오대양 육대주 아우른 환지구적 연구
정치적 문명론 탈피, 현대 담론 제시
‘위장간첩 깐수’ 故 정수일 교수 신작
문명교류학/ 정수일/ 창비/ 5만8000원
“… 문명은 세계의 모든 사회와 지역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양식으로 연속적인 발전 단계를 거쳐 진화한다. 이러한 진화 단계는 야만 시대에서, 미개 시대를 거쳐, 문명 시대에 이르는 3단계로, 초기 진화론자들은 모든 문명은 이렇게 동일한 선을 따라 단계적으로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허버트 스펜서와 모건, 타일러 등에 의해 이 같은 단선적 ‘문명진화론’이 등장하며 근대 문명론 논의가 시작됐다. 논의는 그래프턴 스미스와 윌리엄 페리의 ‘문명이동론’을 거쳐, 20세기 아널드 토인비의 ‘문명순환론’으로 이어져 왔다. 특히 토인비는 문명이 불리한 환경의 도전에 대해 성공적으로 응전해야 성장이 가능하다며 ‘도전과 응전의 원리’에 따라 탄생∼성장∼붕괴∼해체의 4단계 사이클을 겪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은 국가를 넘어선 문명사 연구 가능성과 순환에 의한 문명의 재생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지만, 종교의 기능과 역할을 과대평가하거나 너무 사변적이라는 비판 역시 받았다.
이어 20세기 후반에는 동방에 대한 서방의 지배주의적 사고를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슬람문명과 중화문명의 도전을 주목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 헌팅턴의 주장을 비판한 해럴드 뮐러의 ‘문명공존론’ 등 현대 문명론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들 현대적 문명론 역시 문명 개념을 종교를 주로 가치체계로 과도하게 축소했고, 정치학적 접근으로 충돌만 부각하면서 문명 간 교류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들은 문명의 공존이나 조화를 언급하면서도 그 실현의 기본 방도와 수단인 (문명) 교류에 관해서는 거의 접근조차 도외시하고 있다. 따라서 문명의 갈등이나 충돌을 공존이나 조화로 치환하는 데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문명정치론’은 내포하고 있는 치명적 한계로 인해 결코 문명 간의 진정한 공조나 조화를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기존 근현대 문명론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명 간 교류를 중심으로 인류 대안을 모색하는 문명교류학의 지향점과 내용을 개괄한 세계적 문명교류학자 고 정수일의 신간이 출간됐다. 한때 ‘위장간첩 깐수’로 불리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복역하기도 했던 저자는, 2000년 출소 이래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을 맡고 세계실크로드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문명교류학 연구에 매진해오다가 지난 2월 이 책의 집필과 교정을 마친 뒤 숙환으로 별세했다.
책에는 육로와 해로, 초원로 등 여러 갈래로 이뤄진 실크로드 교역이 한반도까지 이어져 왔음을 입증하고 아메리카를 포함하는 환지구적 차원의 문명 교류를 선구적으로 탐방하는 등 저자의 주요 문명교류학 연구 성과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저자는 먼저 공유성에 바탕을 둔 문명 개념의 이해를 시도하고 각종 근현대 문명론과 그 한계를 개괄한 뒤, 문명교류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즉, 문명의 교류가 어떻게 시작했고, 문명 교류 태동기와 여명기, 발전기, 개화기 등 네 단계를 거쳐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이를 통해 육로와 초원로, 해로라는 세 가지 실크로드를 유라시아에만 한정했던 기존 통념을 깨고 오대양 육대주를 아우르는 환지구적 문명 교류로 확장해 나간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동시베리아에 이르는 광활한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산재하는 무덤인 ‘쿠르간’들에 대한 현장조사를 통해 지금까지 어림짐작으로만 그어진 초원 실크로드 노선을 문명 교류 통로로 확정하기도 한다.
저자는 또 잘린 칼 모양의 명도전 루트와 지석묘, 가락국 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의 국제결혼, 빗살무늬 토기 문화대 등 생생한 역사적 사례를 토대로 지구적인 실크로드가 한반도에도 뿌리내려 있었다는 것을 실증하는 데 성공한다.
1300여년 전 세계적인 서역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문명 여행자 혜초와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의 주인’이라는 평을 들으며 다섯 차례 서역 원정을 단행하고 제지술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 고선지 장군 등 세계 문명교류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선현을 살펴보기도 한다.
저자는 인류의 공존공영을 지향하는 범세계적인 ‘보편문명’이야말로 절박한 시대적 요청이라며 총체론적 연구와 비교론적 연구, 통시적 접근 등 보편문명을 궁구하는 문명교류학의 연구방법을 제창한다. 사실상 첫 문명교류학 개론서라는 점에서 각론에선 보완해야 할 점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문제의식과 방향만은 선명하다.
“문명이 문명답게 생성되기 위해서는 문명과 사회의 관계에서 혁신적 패러다임이 구축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관계론에 바탕을 둔 현대적 문명담론이고, 그 핵심은 인류가 교류를 통해 보편문명을 창출하며 나아가 문명대안론에 입각한 이상적 미래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대비하는 첫걸음이 바로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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