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 피리’도 일부 소실된 채 발견
지난 7일 시민들의 발길이 분주한 부여 중앙시장 바로 앞, 텅 빈 공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은 잡초가 바람에 흩날리는 고요한 땅이지만 이곳은 1500여년 전 백제의 중흥을 꿈꿨던 사비 시대의 심장부였다. 사비 왕궁지로 추정되는 이곳 충청남도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백제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발굴돼 이목이 쏠리고 있다.
◆ 흙 속에서 건져 올린 백제의 행정 기록, 목간
백제는 538년 웅진(공주)의 험준한 지형을 뒤로하고 넓고 평탄한 사비(부여)로 천도했다. 관북리 유적은 1982년부터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대형 전각 건물, 연못, 수로 등 확인돼 사비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번 16차 조사(2024~2025)의 핵심 성과는 국내 단일 유적에서 최대 수량으로 발견된 목간(木簡) 329점이다. 목간은 종이가 귀했던 시절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뭇조각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은 목간에 적힌 글씨를 삭제하거나 수정하기 위해 표면을 깎아내기도 했는데 이때 나온 부스러기를 ‘삭설(削屑)’이라고 부른다.
‘땅을 팔수록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처럼, 이번 조사는 세 단계 층위로 구분된다. 가장 오래전인 1단계 층에서 건물 3동과 북동-남서의 대각선 방향으로 긴 수로가 확인됐는데 목간은 이 수로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됐다. 조사단은 흙과 나무색이 비슷해서 놓치는 게 있을까 봐 흙까지 통째로 옮겨 세밀하게 목간을 수습한 것으로 전해졌다.
발굴된 목간은 백제 사비기에서 가장 이른 시기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간지(干支)가 기록된 목간이 출토되어 제작 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경신년(庚申年)’은 540년, ‘계해년(癸亥年)’은 543년에 해당한다. 이는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538년 직후에 목간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인사 기록 및 국가재정과 관련된 장부, 관등·관직이 적힌 목간과 삭설이 다수 출토되어, 해당 공간이 백제 중앙 행정 관청인 22부사(部司)와 관련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편철(編綴) 목간(목간을 발처럼 끈으로 엮어 만든 것) 가운데, “功四爲小將軍刀足二(공사위소장군도족이)”가 적힌 목간은 ‘공적이 4개인 도족이를 소장군으로 삼다’는 뜻의 인사 관련 문서도 출토됐다.
◆백제인의 음악…화장실에서 발견된 ‘피리 반쪽’
이후 사비 백제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기존의 수로와 건물 3동을 매몰한 뒤에 남북 방향으로 긴 건물을 조성했다. 3단계에 들어서는 부지를 더욱 확장해 왕궁의 정전 전면에 배치되는 조당(朝堂·왕과 신하들이 국정을 논의하는 공간)을 좌우 대칭으로 설치했는데, 이번 발굴지는 그중 서측 건물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발굴된 횡적(橫笛·가로 피리)은 7세기 무렵 조당 건물로 파악되는 건물지 인근의 구덩이에서 발견됐다. 대나무 소재로 네 개의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었으나 발견 당시 일부가 없어진 채 납작하게 눌린 상태였다. 다른 일부는 발견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흥미로운 점은 횡적이 발견된 구덩이 내부의 유기물을 분석한 결과 인체 기생충란이 함께 검출돼 발굴된 곳이 조당에 부속된 화장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유추된다.
횡적은 중국과 일본의 사례와 비교 연구한 결과 오늘날의 소금 (小笒·우리나라 전통적인 목관악기 중 하나)과 유사한 악기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발굴은 백제 횡적의 실체를 최초로 확인한 사례이자 삼국시대를 통틀어서 실물 관악기가 발견된 첫 사례이자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사비 백제 왕궁의 핵심 공간에서 악기가 발견되었다는 점은 백제 궁중음악 연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백제의 음악과 소리를 실증적으로 복원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복원된 악기를 통해 1500년 전 백제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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