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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과거사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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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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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진주만 발언, 日에 충격
‘화해 이미 이뤄졌다’ 인식 순진해
결코 간단하지 않은 ‘과거사 갈등’
단번에 풀 수 있다는 오만 버려야

모리 시게아키(森重昭)는 1937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8월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그는 탄착 지점에서 2.5㎞ 떨어진 곳에 있어 살아남았다. 훗날 히로시마 역사를 연구하는 향토사학자가 된 모리는 피폭 당시 히로시마에 포로 등으로 억류돼 있던 미국인 12명의 사망을 밝혀냈다. 일본은 물론 미국 측 문서까지 탈탈 헤집은 결과였다. 그의 저서 ‘원폭에 희생된 미국인 포로의 비밀’은 일본 학계의 호평을 받았고, 영어로 번역돼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미 행정부는 모리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지난달 15일 히로시마의 한 병원에서 모리가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AP통신은 ‘오바마와 역사적 포옹을 나눈 원폭 생존자가 사망했다’는 부고 기사를 내보냈다. 2016년 5월 히로시마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원폭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해 모리를 끌어안는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재등장했다. 당시 오바마는 일본 정부나 국민을 상대로 미군의 원폭 투하를 사과하진 않았다. 그래도 일본 언론은 모리가 오바마의 품에 안긴 장면을 두 나라 간 화해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김태훈 논설위원

모리의 별세 며칠 뒤 백악관에서 미·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 면전에서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언급한 점이 화제가 됐다. 트럼프는 “일본은 왜 진주만 공격 전에 미국에 알리지 않았느냐”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일본인들 입장에선 듣기 거북했을 것이다.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며 급히 상체를 뒤로 젖힌 다카이치의 반응이 이를 보여준다.

아마도 다수 일본인은 2016년 12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오바마가 나란히 진주만을 방문한 일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당시 아베는 진주만 희생자를 기리고 생존자들을 위로했으나 사과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미·일 양국의 아픈 과거사를 두고 화해가 이뤄졌다고 여긴 이들로선 이번 트럼프 발언에 충격이 몹시 컸을 것이다.

2차대전 기간 여러 나라가 참전하고 수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전쟁을 대하는 세계인의 인식은 지극히 단순하고 편협하다. 자신의 국가와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면 망각하거나 별것 아니라고 치부하기 일쑤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겸 작가 앤 애플바움이 2차대전에 관해 “우리가 만약 미국인이라면 전쟁을 1941년 진주만에서 시작돼 1945년 원폭으로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우린 그저 전쟁의 단편밖에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어쩌면 일본인도 미국인과 비슷할 것이다. 다만 미국인은 진주만, 일본인은 원폭을 훨씬 더 강렬하게 기억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얼마 전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가 한국을 찾아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폴란드·독일 사이는 흔히 한·일 관계와 비교되곤 한다. 많은 한국인은 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독일(당시 서독) 총리가 2차대전 희생자들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한 점을 들어 ‘폴란드·독일 간 과거사 문제는 끝났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일본은 왜 독일처럼 하지 않느냐’는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2025년 9월 독일을 찾은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은 2차대전 배상금 명목으로 1조3000억유로(약 2258조원)의 지급을 독일에 청구했다. “과거사 분쟁은 이미 종료했다”는 독일과 달리 폴란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우리 주변엔 ‘과거사가 깨끗이 정리돼야 비로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이가 의외로 많은 듯하다. 하나 정말 뼈저리게 사무치는 기억은 사과 한 번 받는 것으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얼핏 봉합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금세 고름이 상처 부위를 뚫고 나와 살갗 위로 흐르는 법이다.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잊지 않고 기억하며 해법을 모색하되 지금 당장, 또 앞으로 꼭 필요한 분야에선 협력을 아끼지 않는 태도가 국제사회의 격랑을 헤쳐 나가는 지혜일 것이다. 트럼프의 언행 그리고 미·일 관계에서 배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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