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통합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 탄생한 프로젝트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국경을 허물고 사람과 자본이 자유롭게 오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막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 결실이 바로 유럽연합(EU)과 솅겐조약이다. 1985년 룩셈부르크의 작은 마을 솅겐에서 체결된 솅겐조약은 1995년 본격 시행 이후 유럽인의 삶을 바꿔 놓았다. 하나의 솅겐 비자만으로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됐다. 관광과 교역, 노동 이동은 활발해졌고 유럽 통합은 한층 깊어졌다. 반면 국경 장벽이 낮아질수록 난민과 불법 이민, 안보 문제는 더욱 복잡한 과제로 떠올랐고, 오늘날 유럽 정치의 가장 민감한 쟁점이 됐다.
최근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자치도시 세우타에서 벌어진 대규모 밀입국 사태는 그러한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세우타가 오래전부터 유럽으로 향하는 불법 이민의 관문이긴 했으나, 하루 동안 6만명 가까운 인원이 몰려든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까지 발생했다. 비교적 관대한 이민 정책을 유지해 온 스페인 정부는 거센 정치적 압박에 직면했고, 주변 유럽 국가들은 앞다퉈 국경 통제를 강화하고 나섰다. 이민 정책을 둘러싼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시 충돌했고, 좌우 진영 간 정치적 대립도 한층 격화됐다. 여기에 미국까지 참전, 사태는 국제적 외교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는 어느 때보다 쉽게 연결된다. 비행기와 인터넷은 거리와 시간을 지웠고, 마치 국경이 허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오히려 더 첨예한 대립과 자국 중심주의, 각자도생의 논리가 깊게 스며 있다. 세우타 밀입국 사태는 단순한 국경 관리 실패를 넘어섰다. 유럽이 오랫동안 의존해 온 ‘신뢰’라는 기반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자유로운 이동이 곧 공동체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일깨운다. 진정한 자유는 국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질서를 함께 만드는 데 있다. 그 신뢰가 무너질 때 ‘국경 없는 유럽’도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이번 일로 유럽 내 반이민 정서가 미국처럼 확산할까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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