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층 두텁고 화랑문화 장기간 축적
유동성 풍부 새 컬렉터 유입 측면도
“과거 서울이 해외 미술을 소개받는 시장이었다면, 이제는 세계 미술계와 한국 미술이 만나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플랫폼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성훈 한국화랑협회장은 2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미술시장의 변화를 이같이 진단했다.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이 주요 국제 행사로 자리 잡고 해외 갤러리와 미술기관의 국내 활동이 늘면서, 서울이 해외 미술을 소비하는 시장을 넘어 한국 작가를 세계무대와 연결하는 거점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변화가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봤다. 수준 높은 작가층과 화랑, 미술기관, 컬렉터 문화가 오랜 시간 함께 성장했고, 그 위에 국제 아트페어의 성장과 해외 기관의 진출이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서울이 국제 미술도시로 성장한 데에는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 같은 대형 행사뿐 아니라 한국 작가를 꾸준히 발굴하고 소개해온 화랑과 미술기관, 작품을 소장해온 컬렉터층의 역할도 컸다고 봤다. 이 회장은 “서울에 모인 국제적인 관심이 한국 작가의 해외 전시와 미술관 소장, 해외 갤러리와의 장기 협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키아프 서울도 한국 작가를 국제무대에 소개하는 역할을 강화한다. 9월 열리는 키아프 서울 2026 특별전은 국내 작가를 중심으로 구성해 한국 현대미술의 저력과 다양성을 조명할 예정이다. 그는 키아프가 단순한 거래 행사를 넘어 신진부터 중견, 원로까지 여러 세대의 작가를 세계 미술계와 연결하는 플랫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투자 열풍 지나…“작가를 오래 지지하려는 구매 회복”
국내 미술시장은 급격한 호황과 조정기를 거쳐 최근 경매 낙찰총액과 고가 작품 거래가 늘며 반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21년 호황은 팬데믹 이후 미술에 대한 관심 확대와 주식·부동산 등 자산시장 팽창, 풍부한 유동성이 맞물린 결과였다. 새로운 컬렉터가 유입된 것은 긍정적이었지만 작품의 예술적 가치보다 단기간의 가격 상승과 투자성이 앞서는 현상도 나타났다.
반면 지금은 작가의 독창적인 작업 세계와 미술사적 가치, 장기적인 소장가치를 따지는 컬렉터가 늘고 있다. 이 회장은 “화랑 현장에서도 단기적인 가격 상승보다 작가의 성장 가능성을 살피고 한 작가를 오랫동안 지지하려는 문의와 구매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을 투자상품이 아닌 문화적 자산으로 보고 작가의 성장을 함께하는 컬렉팅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국내 경매에서 100억원대 낙찰작이 등장한 데 대해서는 한국 미술시장의 구매력과 위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했다. 다만 일부 초고가 거래만으로 시장 전체의 회복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경매에서 거액의 낙찰이 나오는 것과 함께, 화랑 중심의 1차 시장에서 신진·중견 작가를 포함한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이 꾸준히 거래되고 컬렉터가 한 작가를 장기간 지지하는 흐름이 확산돼야 시장의 기반이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 작가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국내 경매 최고가 상위 10점 가운데 7점이 한국 작가의 작품이었고, 작가별 낙찰총액에서도 김환기와 이우환 등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 회장은 “국내 컬렉터들이 한국 작가의 독보적인 작업 세계와 미술사적 가치를 재평가하며 소장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거장의 가격 상승에 머물지 않고 신진과 중견, 원로 작가가 함께 성장하려면 화랑이 새로운 작가를 꾸준히 발굴하고 컬렉터가 이들의 작업을 장기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단색화서 신진·미디어아트까지…넓어지는 K아트
한국 작가들의 해외 성과도 특정 세대와 장르를 넘어 확대되고 있다. 하종현·박서보 등 단색화 거장들이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을 높였고, 이배 등 중견 작가도 해외 주요 아트페어와 전시, 경매에서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홍영인·이목하·김선우 등 젊은 작가들도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목하는 ‘포브스코리아 30세 미만 30인’에 선정되는 등 존재감을 넓혔다.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단색화나 일부 유명 작가에 한정되지 않고 동시대 작가로 확장되고 있다는 게 이 회장의 평가다.
장르도 다양해졌다. 회화뿐 아니라 설치와 영상, 미디어아트 분야 작가들이 국제무대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김아영은 미디어아트 분야의 권위 있는 상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골든 니카를 수상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해외 진출 경로 역시 아트페어 참가와 경매 낙찰을 넘어 해외 갤러리와의 장기 협업, 미술관 전시와 소장, 국제 비평과 연구 플랫폼을 통한 소개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이 회장은 아트페어 완판이나 고가 낙찰도 의미가 있지만, 전시와 소장, 현지 갤러리와의 협업, 비평적 평가가 함께 쌓여야 작가의 국제적 위상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봤다.
국내 컬렉터층의 성장도 해외 진출을 뒷받침하는 기반이다. 국내에서 먼저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소장하고 화랑이 장기적으로 지원해야 해외 갤러리나 미술기관과의 협업도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얻은 관심이 다시 국내 전시와 연구, 새로운 컬렉터 유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술진흥법부터 기업 후원까지…K아트 지속 성장의 조건
이 회장은 한국 미술시장의 경쟁력으로 두터운 관람층과 젊은 세대의 높은 문화예술 참여도를 꼽았다. 다만 관람객 증가가 곧바로 시장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전시에서 생긴 관심이 작품 소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며 “미술관은 관람층을 넓히고 화랑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며 컬렉터와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관람층이 미술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작품과 작가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봤다. 관람 경험이 축적되고 자신의 취향이 형성돼야 첫 작품 구매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미술관과 화랑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미술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제도적 기반도 뒷받침돼야 한다. 이 회장은 미술진흥법 제정으로 미술 생태계를 지원할 토대가 마련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작가와 화랑, 미술기관이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지원으로 이어지려면 구체적인 실행 방안과 지속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K아트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시장 성과나 K컬처의 흐름에 기대기보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미술시장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정부와 기업, 미술계가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는 작가의 창작 환경과 시장 기반을 마련하고, 기업은 문화예술 후원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확장하며, 미술계는 국제 교류를 확대하고 작가와 시장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작가와 화랑, 미술기관이 장기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기업은 일회성 후원을 넘어 작가와 전시를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미술계에는 해외 미술관과 갤러리, 비평가, 컬렉터와의 관계를 넓혀 한국 작가의 해외 활동이 전시와 소장, 장기 협업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주문했다.
이 회장은 “서울에 모인 국제적인 관심이 한국 작가의 해외 전시와 미술관 소장, 해외 갤러리와의 장기 협업으로 이어져야 한다”며 “이런 선순환이 자리 잡아야 서울도 행사가 열리는 도시를 넘어 세계 미술계와 한국 미술이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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