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해야 했던 삶의 이야기들 다시 더듬어봐야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은 초출(初出)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조부모님 함자를 한자로 쓰는 숙제가 있었는데 할머니는 이름을 복자(福子)라고 적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써 준 이름을 굳이 다시 초출로 고쳐줬다. 복자보다 초출이 더 쉬운 한자라서 나는 초출이 더 좋은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수십년 뒤였다. 할머니가 “나 이름은 순사가 지어분 거라”고 하셨을 때였다.
할머니는 제주도 여성이다. 초출이란 이름은 첫아들을 바라던 할머니의 아버지가 딸이 태어나자 실망해서 “처음 놘 거난 초출이라 부르라”며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이름 발음 탓에 친구들에게 놀림도 많이 당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순사가 강제로 이름을 바꿨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후쿠코(福子)다.” 창씨개명의 시대였다. 하지만 구박받던 첫딸은 처음 들어본 ‘예쁜 여자아이 이름’을 평생 놓지 못했다. 할머니는 언제나 이름을 한자로 쓰셨다.
최근 배우 하영의 증조부 논란이 뜨거웠다. 배우가 방송에서 집안 얘기를 하면서 ‘4대째 의사 집안’이라 했더니 증조부의 과거 친일 행적들이 발견된 것이다. 남의 집안 친일 정보를 어떻게 볼 수 있나 궁금해져 찾아본 덕분에 정부가 과거 기록을 엄청나게 잘 정리해 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는 고대사부터 시작해서 대한제국, 조선총독부, 대한민국 등의 공무원 직원록까지 모두 정리해 놨다. 가까운 과거인 100년 전 신문들도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로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구박받는 첫딸이었던 우리 할머니의 인생은 어땠을까. 할머니의 이름부터 찾아봤지만 평범한 시골 여인의 이름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단서로 넘어갔다.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젊은 시절 이야기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할머니는 장사를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일을 쉬는 주말이 다가오면 금요일에 식사 준비를 해두고는 할아버지에게 어린 큰아버지를 맡긴 뒤 목포행 배를 탔다. 목포에서 ‘이것저것’ 사들여 서울행 밤 기차에 오른 뒤, 토요일 새벽 서울역에 내려 동대문시장(현 광장시장)에서 팔고, 중국 상인에게 비단을 사 오는 장사였다. 그렇게 하면 토요일 밤 목포행 기차에 올라 일요일 새벽에 목포에서 비단을 팔고 제주도로 월요일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엄청난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사내들 사이에서 돈과 짐을 지키려고 친구와 번갈아 쪽잠을 자고 속치마 속에 전대(돈띠)를 깊이 둘렀던 얘기 등을 신이 나서 하시곤 했다. 돈이 너무 잘 벌렸는데 어느 순간 미군정이 육지로 못 나가게 막았다는 얘기도 했다.
모험담 정도로 들었다. 그런데 자료를 뒤져보니 좀 달리 보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미곡 배급 문제를 오판하고 있었다. 남한의 쌀이 너무 일찍 동나 식량 문제가 터지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미군은 급기야 1946년 1월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고 쌀을 강제 수매한다. 이 와중에 1946년 5월에는 부산에서 콜레라가 창궐했고 곧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퍼진다. 제주도는 여기에 보리 흉작으로 식량난까지 겪는다. 할머니가 억척같이 배와 기차를 갈아타는 장사를 벌인 시기와 딱 겹친다. 서울에선 ‘비단’을 샀다면서도 목포에서 산 물품은 굳이 쌀이나 면포라고 하지 않고 ‘이것저것’이라고 한 이유도 이런 배경 탓일 테다. 그렇게 2년쯤 장사를 벌이다 ‘미군정이 육지로 못 나가게 막았다’고 한 때는 1947년 3월 제주 총파업부터 이듬해 4·3사태로 이어지는 격동기였다.
할머니는 이름을 왜 복자라고 쓰는지 설명한 적이 없었다. 비단 장사를 자랑할 때도 목포에서 산 상품은 언급하지 않았다. 돈벌이가 좋았다면서 장사를 접은 이유도 그저 미군이 막았다고만 했다. 총천연색인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 속에서 유독 흑백사진처럼 구체성을 잃는 단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침묵해야 할 것 같고,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애매한 얘기들이다.
그러니 한 번쯤 인터넷에 접속해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이나 살던 곳, 옛날얘기의 배경 등을 검색해 보면 어떨까. 딱 부러지는 통쾌함은 발견하기 힘들지라도 어떻게든 삶을 살아보려 애썼던 그분들의 노력만큼은 절절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김상훈 실버라이닝솔루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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