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성 규
그러나,로 시작되는 문장을 쓰지 않기 위해
새벽마다 달력의 날짜를 지웠다
길은 온몸을 꼬며 하늘로 기어가고
벌판을 지우는 눈보라
빈집의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뿌리에 창을 감추지 않고 어떻게 잠들 수가 있겠는가
흙덩이 같은 어둠을 매단 후박나무가
내 뒤를 따라 벌판을 걸어온다
창문이 꾸역꾸역 눈덩이를 삼킨다
잔뜩 웅크린 지붕 아래 고개를 숙이고
불빛에 시린 손을 말린다
벌판을 몰아치는 눈송이
짐승은 어떻게 눈보라 속에서 길을 찾는가
수많은 가위표로 그어진
달력은 더이상 좌표를 묻지 않는다
후박나무가 다가와 뿌리로 내 몸을 감싼다
조금씩 하늘을 찢어내며 날아가는 쇠기러기
허기진 공룡의 뱃속 같은 땅을 찾고 있다
눈보라가 사방에 거대한 벽을 만든다
북극으로 날개를 펴는 눈보라
눈을 감고 공중에 빈손을 흔든다
―신작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창비)에서
▲1977년 충북 옥천 출생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당선
▲‘시힘’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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