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10년차의 윤선영씨가 교환석에서 전화번호를 안내하고 있다. |
지난 1일로 114 전화번호 안내 첫 인사가 “안녕하십니까”에서 “사랑합니다, 고객님”으로 바뀐 지 만 2년이 지났다. 1935년부터 시작된 114 전화번호 안내 서비스는 “몇 호입니다”(∼1980년대) “안내입니다”(80년대) “네네∼”(90년대) “안녕하십니까”(1997∼2006년) 등으로 바뀌어 온 첫 인사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운영 주체가 기존 KT에서 코이드(한국인포데이타, 충북∼제주 7개 지역)와 코이스(한국인포서비스, 서울·경기·강원 3개 지역) 등 두 민간업체로 나뉘었다. 또 번호안내 서비스도 무료에서 한 번호당 120원으로 유료화됐다.
또 코이드는 114 번호 안내뿐만 아니라 서울시와 국민은행 등 공공기관·기업체 30여곳의 콜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화번호 데이터베이스(DB) 등을 활용한 영어회화 교육 서비스(스피크114), 모니터링·리서치 사업(리서치114)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대 중이다. 그래도 주력 사업은 여전히 114 번호 안내. 지난해 총매출 약 1940억원 중 절반이 넘는 1023억여원을 114·우선 번호안내사업에서 올렸다. 코이드 창사 8주년(6월27일)을 맞아 대전에 있는 충남본부를 찾아 하루에 1000번 이상 낯선 이에게 ‘사랑 고백’하느라 여념이 없는 상담원들을 만났다.
#“한 번 들어도 ‘닭스’와 ‘닥스’ 구별돼요”
코이드 충남본부에는 480여명의 전화번호 안내 상담원이 근무하고 있다. 모두 여성으로 연령은 21세부터 58세까지. 기혼과 미혼이 반반 정도다. 예전엔 남성 상담원이 있기도 했지만 사근사근하고 낭랑한 ‘솔’음이 아닌 저음의 톤을 고객이 먼저 낯설어 한 탓에 지금은 한 명도 없다. 충남본부에서는 대전과 충남을 다시 6개 권역으로 나눠 그곳에서 걸려오는 문의전화를 소화한다. 물론 번호 안내는 전국 모든 지역이 가능하다. 오전 8시∼오후 10시 사이 본부로 출근해 8시간 동안 번호를 안내하는 일반 상담원이 매시간 150명 정도 근무하고, 오후 10시 이후에는 180여명의 재택근무 상담원들이 번호를 안내한다.
◇휴게실 전광판을 통해 현재 상담원 수와 대기시간, 대기호수가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
밤 시간대에는 안내 첫 인사가 “안녕하십니까?”로 바뀐다. ‘사랑합니다’란 인삿말을 악용해 수작(?)을 거는 남성들이 야간에는 더욱 많아지기 때문이다.
코이드에 따르면 오전 11∼12시에는 음식 배달과 좌석 예약 등을 문의하는 전화가 폭주한다. 또 요일별로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순으로 바쁘고, 월별로는 택배회사, 송년모임 장소 등을 묻는 전화가 줄을 잇는 12월이 상담원들에게는 가장 고달프다. 또 태풍과 교통 사고 등 사건 사고가 터진 날에도 114 전화회선은 난리가 난다.
평균 16초씩 50분 동안 쉴 틈 없이 계속해 번호를 안내해야 할 정도로 바쁜 오전 11시∼낮 12시, 옆자리 출근자에게 “지금 왔어?”라고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간혹 안내하는 동안 설치된 거울을 바라보며 미소 연습까지 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윤선영(36)씨는 상담원 10년차 베테랑이다. 윤씨는 “가끔 결리는 목과 어깨, 가족·친척들과 노래방을 가더라도 절대 노래를 부르지 않는 습관, 친구와 통화에서 가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실수 등이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일 수 있겠는데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을 접할 수 있어 일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전화번호 상담원 모두가 여성인 코이드 충남 본부에서는 근무자들의 편의를 위해 어린이집과 각종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다. |
다양한 음색과 톤, 발음만 갖고 고객이 원하는 번호를 파악해 정확히 안내할 때의 쾌감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윤씨는 음식점 ‘하울소’와 ‘하늘소’, 다방 ‘흑다방’과 ‘흙다방’, 의류매장 ‘닥스’와 치킨점 ‘닭스’ 등 헷갈릴 수 있는 상호명도 고객 목소리와 분위기에 따라 단번에 판단하는 능력이 생겼다고 자랑이다.
# 전화 목소리를 통해 보는 사람과 세상
그는 직접 대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대충 그 사람의 성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인삿말에 “저도 사랑해요”라고 응대하는 고객이 있는가 하면, 등록되지 않은 상점 전화번호를 놓고 “○○동에 있는데 왜 가르쳐 주지 않느냐”고 5분여간 생떼를 쓰는 사람도 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흐아∼” 하고 신음소리를 내는 ‘관심고객’도, ‘○○’라는 퉁명스러운 말로 시작해 재차 문의한 곳에 대해 물으면 다짜고짜 “귀먹었어? 이 ×××”하며 끊어버리는 사람도 겪어봤다.
윤씨는 “이 일을 그만둘 때는 업무보다는 입에 담기조차 힘든 욕설을 내뱉는 고객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수고하십니다’는 말 한마디가 적게는 하루 1000회, 많게는 1400회 번호를 안내하는 상담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주 바쁠 때만 가끔 교환석에 앉는 김도숙(52) 정보안내부장에게도 상담원으로서의 지난 34년은 후회되지 않는 세월이었다. 굳이 검색창에 쳐보지 않아도 즉석에서 답할 수 있을 정도로 암기하고 있는 수백개의 전화번호 때문이 아니다.
‘아이가 아픈데 근처 병원이 문을 닫았다’며 가장 가까운 곳에 문을 연 병원을 알려 달라는 새내기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 ‘내 얘기 좀 들어 달라’며 자신의 인생 이력을 줄줄이 풀어낸 뒤 ‘고맙다’고 전화를 끊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 ‘비가 엄청 많이 내리는데 공사장 맨홀 뚜껑이 열려 위험하다’는 전화를 받고 해당 기관에 신고할 때의 뿌듯함 등이 그로 하여금 114 전화안내 업무를 평생 직업으로 택하게 한 힘이다. 김 부장은 “얼핏 보기엔 단순하고 기계적인 업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사람과 사회, 세상이 다 보인다”며 “114 안내원을 상담원이라고 일컫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전=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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