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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36>최초의 의병장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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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4-14 19:50:20 수정 : 2009-04-14 19: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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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국난기 맞아 '노블레스 오블리주' 온몸으로 실천
최근 소위 ‘박연차 리스트’로 정국이 들끓고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화살은 그토록 도덕성을 강조했던 전직 대통령에게 향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중요성이 재삼 강조되는 시점이다. 지금부터 457년 전 4월 임진왜란이라는 최대의 국난기를 맞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였다.

◇홍의장군 곽재우 상상도.
#1.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함대가 부산포 앞바다를 까맣게 메우고 있었다. 이어진 조선군과의 혈전. 부산포 첨사 정발이 전사하였고, 동래부사 송상현의 장렬한 전사와 함께 동래성도 무너졌다. 왜적의 진군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전란 초기 관군의 거듭되는 패전 속에서 국왕이 국경선 지역까지 피난 가는 치욕을 맛보는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반격의 물꼬를 틔우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지방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조직하여 저항한 것이다. 의병은 자발적으로 봉기한 군사들로서 전직관료, 유생, 일반 백성, 노비, 승려까지 의병에 참여하면서 조선 최대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중에서 곽재우는 가장 먼저 사재(私財)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 직후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난 상황은 ‘선조수정실록’의 아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에 삼도의 신하들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때문에 왜란이 일어난 뒤에 병기와 군량을 독촉하니 백성들은 모두 질시하여 왜적을 만나면 피신하였다. 마침내 도내의 거족(巨族)으로 명망 있는 사림과 유생 등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義)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는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6월 1일)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관군이 패전을 거듭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인심을 잃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방의 명망 사족들은 백성들이 주축이 된 의병들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저항에 나섰다. 이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곽재우(1552?1617)였다.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당시 그의 휘하에 모인 군사가 10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평소에 그가 닦아 놓은 기반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경남 의령 곽재우 생가.
“의령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 곽재우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의 빈 성으로 들어가 병장기와 군량을 취득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

40세가 넘은 나이에 의병운동을 하는 그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거나 도적 노릇을 한다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곽재우는 민첩한 첩보활동과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통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남강의 나루터 정암진(鼎巖津)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의령?삼가?합천 등을 수복하였고, 이어 현풍?창녕?영산의 왜군까지 섬멸하여 경상우도 지역을 평정하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전 재산을 털어 항전에 나선 곽재우. 그는 위기의 시기에 사회 지도층이 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몸소 보여주었다. 최근 다시 회자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용어가 곽재우에게 무척이나 어울려 보인다.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관군과 연합해 1592년 왜적을 대패시킨 진주성의 17세기 지도.
#2. 의병 정신의 뿌리, 남명 조식


의병장들은 대부분이 지역의 명망가로서, 이들을 따르는 농민과 천민이 자발적으로 합세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은 향상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지역을 거점으로 게릴라전과 유격전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지리에 어두운 왜적들을 후방에서 교란시키면서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선봉이 될 수 있었다. 의병에는 불법을 닦는 승려들도 참여하였다. 서산대사로 더 잘 알려진 휴정은 선조의 명을 받들어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병 결성을 독려하였다. 금강산 표훈사에 있던 휴정의 제자 사명당 유정은 휴정의 격문을 받고 다시 사방에 글을 띄워 무리를 모아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거의 10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 승병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경비나 무너진 성의 보수와 같은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아 여러 곳에서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의병들은 관군과의 연합전도 전개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대표적으로 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0월)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관군과 곽재우, 최경회, 임계영의 의병 부대가 합류하여 왜적을 대패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 또한 관군과 의병의 합작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적장을 껴안고 투신한 의기(義妓) 논개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8000여명의 병력으로 3만의 왜적을 물리쳤다. 이외에 서산대사, 사명당, 처영, 영규 등 승려들도 의병장이 되어 승군을 조직하여 전투에 적극 참여하여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지방의 수령과 무장들의 무능에 대한 비판과 함께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는 자발적 향토방위 조직이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시로 채택된 성리학 이념의 충의(忠義) 정신 또한 한몫하였다. 의병 활동은 경상우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왜적의 주요 침입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중기 칼을 차고 다니면서 의(義)의 중요성을 강조한 남명 조식의 사상적 영향력도 큰 작용을 하였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조종도, 이대기 등 조식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식의 실천중시 사상은 이 지역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국난의 시기에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합천의 정인홍,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등은 이 지역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의병장이자 조식의 문인이었다.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녀 사위로서 조식에게 직접 병법을 배우기도 했다. 경상우도 지역 의병의 활약은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보호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경남 진주성의 모습.
#3. 의병장들의 씁쓸한 최후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의 활약은 전국 곳곳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의병장은 활약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의병들의 공이 컸다는 것은 관군의 역할이 미미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정권 담당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이들이 혹시 어수선한 시국과 전란으로 인한 불만을 틈타 모반을 꾸미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실제로 전란 중에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모반사건도 발생했는데 이들은 세력 규합을 위해 이름난 의병장의 이름을 파는 경우가 있어 정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의병장 김덕령은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 석저촌 출신으로, 유학을 익힌 데다 무예에도 뛰어나 ‘지혜는 제갈공명과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게가 100근이나 나가는 큰 철퇴 두 개를 허리 아래 좌우에 차고 다녀 ‘신장(神將)’이라고 불렸던 그는 1593년 겨울 어머니 상중임에도 담양에서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의병전쟁에 뛰어들었다. 가는 곳마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 이름만으로도 왜병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 김덕령이었지만, 그의 활약을 견제하는 세력들의 집요한 모함을 받았다. 1596년 7월 전쟁의 와중에서 이몽학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관련자들의 공초(供招?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에 장수가 김덕령이며 함께 거병을 모의했다는 등의 진술이 나오면서 김덕령은 체포되었다. 결국 김덕령은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곽재우가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후 산으로 들어간 것도 현실 정치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전후에 전공(戰功)은 왕을 호위했던 공신들의 손에 넘어가고 의병장에 대한 대접은 취약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도 전쟁 초기 경상감사까지 죽이려고 했던 곽재우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인식하였다. 전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은밀히 감시인을 파견하여 곽재우의 동정을 살피면서 그를 압박해 나갔다. 이에 곽재우는 관직에 뜻을 잃고 현풍의 비슬산으로 들어갔다. “고양이를 기른 것은 쥐를 잡기 위함이니, 이제 적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할 일이 없다. 이제 돌아갈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산으로 들어간 곽재우는 이곳에서 도가(道家) 사상에 심취하여 단곡(斷穀?곡식을 끊는 도가의 수련법)에 심취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전란 후에 선조는 전쟁의 최고 공로를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군대의 공으로 돌렸고, 이 과정에서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오른 대신들이 전쟁의 최고 공로자로 보상을 받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실제 임진왜란 유공자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를 수행한 호성공신(扈聖功臣)은 86명이나 책봉한 데 비하여, 전공(戰功)이 있는 사람에게 준 선무공신(宣武功臣)은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곽재우는 추천을 받았지만 생존해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공신의 책봉 과정에서도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격하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 자신의 책무를 다했던 김덕령, 곽재우 등 전쟁 영웅들의 비참한 말로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들과 그들의 후손이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던 우리 현대사를 떠올리게도 한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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