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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38> 이문건의 ‘양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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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5-12 18:34:18 수정 : 2009-05-12 18: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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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쓴 손자 양육일기…조선전기 생활상 ‘생생히’
5월은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5일 어린이날과 8일 어버이날에 이어 15일 스승의 날, 20일 성년의 날이 연이어 있다. 가정의 달이어서 그런지 역사 속에서 아이를 기른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 떠오른다. 그것도 할아버지가 쓴 손자에 대한 양육 일기이다. 제목은 ‘양아록(養兒錄)’, 저자는 16세기의 학자 이문건. 그는 왜 손자의 양육 일기를 쓴 것일까?

◇조선 전기 학자였던 묵재 이문건은 문집 ‘묵재일기’와 더불어 손자가 태어나 성장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기록한 ‘양아록’을 남겼다. 사진은 ‘양아록’의 일부.
#1. 이문건은 누구인가?


‘양아록’의 저자 이문건(李文健:1494∼1567)은 16세기 중종, 명종 시대를 살아간 관료, 학자였다. 본관은 성주, 호는 묵재이다. 8대조는 고려말 명재상인 이조년이었고, 5대조는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이었다. 증조부 이함녕도 과거에 급제했으며, 부친 이윤택과 백부 이윤식이 함께 과거에 급제하면서 명문가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문건은 형 이충건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관료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가 사약을 받으면서 그의 인생도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문건은 조광조를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실권자 남곤, 심정의 미움을 받아 형과 함께 옥사에 연루되었다. 1521년 형 이충건은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 사망했으며, 이문건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형벌을 받았다. 1527년 다행히 사면이 된 이문건은 이듬해 과거에 합격하였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인생은 순탄하게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인종이 빨리 죽고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주도하는 외척정치가 시작되었고, 인종의 편에 섰던 이문건 역시 정치적 탄압을 피할 수가 없었다. 특히 큰 형인 이홍건의 아들 이휘가 명종의 즉위를 반대하는 말을 퍼뜨렸다 하여 시신이 팔도에 효시되는 참형에 처해졌고, 이문건은 성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가던 이문건 집안은 이처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몰락해가고 있었다.

이문건에게는 가정적인 불운도 겹쳤다. 23세가 되던 해에 안동 김씨 김언묵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아이들은 대부분 천연두(마마) 등의 병으로 불구가 되거나 일찍 사망하였다. 유일하게 장성한 아들이 둘째 아들 온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이문건의 애정과 기대는 컸다.

하지만 온 역시 어릴 때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문건은 모자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전혀 기대에 못미쳤다. 이문건은 공부를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자식에게 매를 대기도 했다. 이문건의 문집인 ‘묵재일기’에는 아들 온과 매일 씨름하며, 분노를 참지 못했던 이문건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아침에 온이 시를 해석하지 못해 화가 치밀어 긴 나무로 때려 나무가 부러졌다.”(11월 23일) “저녁에 온이 화나게 해서 대나무로 때렸더니 기분이 상했다.”(11월 24일) “아침 일찍 온의 뺨을 발로 밟았다. 또 머리카락도 한 움큼 뽑아 버렸다.”(12월 8일)

이문건이 아들에게 화를 내고 매를 대는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아버지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많은 자식을 잃고 하나 남은 자식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때문일까? 그 혼내는 정도가 요즈음보다 심했다.

◇김홍도가 8폭 병풍에 펼쳐 그린 ‘모당평생도’ 중 돌잔치를 기록한 제1폭.
#2. 이문건이 ‘양아록’을 쓴 까닭


정치적으로 유배의 길에 있었고, 자식 복은 지지리도 없었던 이문건에게 희망의 빛이 찾아 들었다. 1551년 1월 5일 아들 온이 그렇게 고대하던 손자를 낳은 것이다. 58세에 맛 본 2대 독자 손자.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였다. 이문건은 손자가 처음 태어난 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리는 생생불식(生生不息:낳아서 쉼이 없음)이라더니 과연 아직 다하지 않아 어리석은 아들이 자식을 얻어 가풍이 이어졌다. 지하의 선령(先靈)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세상의 뒤의 일들이 모두 잘 될 것 같다. 오늘 저 어린 손자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며, 노년에 내가 아이 크는 모습을 지켜보겠다. 귀양살이 쓸쓸하던 터에 좋은 일이 생겨 나 혼자 술을 따르며 자축을 한다.”

아이의 이름은 ‘길하라’는 뜻으로 숙길(淑吉)이라 했다.(후에 숙길은 수봉(守封)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제 이문건의 모든 관심은 손자에게 향했다. 아이가 차츰 일어서고, 이가 나고 걷기 시작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문건은 손자의 이 모든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쓴 손자의 육아일기 ‘양아록’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이문건은 일기를 쓴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을 꼭 기록할 것은 없지만 기록하는 것은 할 일이 없어서이다.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려고 해도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으며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고독하게 거처하는데 오직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 습좌(習坐), 생치(生齒), 포복(匍匐) 등의 짧은 글을 뒤에 기록하여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게 되면 아마 글로나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손자의 출생은 귀양살이와 연이은 가족사의 불운에서 오는 이문건의 좌절감을 일거에 씻어줄 수 있는 가뭄 속의 단비였다. 이문건은 귀양살이의 여유(?) 속에 손자가 자라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기록에 대한 그의 열망은 이 모습을 하나하나 정리해내게 했다.

선비가 육아일기를 쓰는 것이 크게 흠이 되지 않았던 조선전기의 사회분위기 또한 ‘양아록’을 쓸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육아 문제를 철저히 여성의 분야로 한정했던 조선후기였다면 ‘양아록’은 쉽게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준근이 그린 ‘기산풍속도첩’ 가운데 평양식 마마배송굿 장면. 이문건은 ‘양아록’에서 여섯살 손자에게 천연두가 찾아들자 이틀 밤낮을 꼬박 새워가며 손자를 간호했다고 기록했다.
#3. ‘양아록’에 표현된 할아버지의 분노와 사랑


‘양아록’에 의해 조선시대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모습이 완벽하게 복원되고 있다. 여섯 달 무렵 아이는 혼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일곱 달이 되자 아래에 이가 생겨 젖꼭지를 물게 되었다.

9개월이 지나자 윗니가 생겼고, 11개월 때 처음 일어서는 모습에 대해서는 “두 손으로 다른 물건을 잡고 양발로 쪼그리고 앉았다. 한 달을 이렇게 하더니 점점 스스로 오금을 펴고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 아이는 할아버지가 글을 읽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의 흉내를 냈다. 이문건은 “손자 아이가 커 가는 것을 보니 내가 늙어가는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면서 손자 키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그러나 위기도 있었다. 5세 때에는 숫돌을 가지고 놀다가 엄지손가락 손톱 가운데를 찍어서 할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아이가 6세 때 찾아든 천연두는 이문건을 특히나 긴장시켰다. 아들과 딸을 천연두로 잃은 경험은 이문건을 노심초사하게 했다. “열이 불덩이 같고 종기는 잔뜩 곪았는데, 몸 전체가 모두 그러하였다. 눕혀 놓아도 고통스러워하고 안아도 역시 아파했다. 아프다고 호소를 해도 구할 방법이 없다. (…) 이틀 밤낮을 틈틈이 미음을 먹이고 어루만져 주며 답답함을 위로해 주었다”는 기록에는 이문건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 천연두는 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천연두를 겨우 극복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마마 자국이 남아 힘겨운 사투의 흔적을 보여 주었다. 조선후기 관리들의 초상화를 모은 ‘진신화상첩’이나 ‘선현영정첩’과 같은 책을 보면 마마 자국이 남아있는 인물이 상당수였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다행히 손자는 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손자가 7세 되던 해에 아들 온이 세상을 떠났고, 이제 손자 숙길을 돌보고 가르치는 것은 온전히 이문건의 몫이 되었다.

아이가 자라고 공부를 가르치면서 할아버지와 손자의 갈등이 커졌다. 이문건의 기대만큼 명석하지가 못했고, 공부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9세이던 해 늦은 봄 손자는 하라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꾸짖는 할아버지의 충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나가 버렸다. 이에 화가 난 할아버지는 직접 내려가 손자를 데려오면서 뒤통수를 다섯 대 때리고, 엉덩이를 네 대 때렸다. 10세 되던 해에는 그네 놀이에 정신이 팔린 손자에게 종아리를 쳤다. 13세부터 손자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만취해서 돌아오던 날 이문건은 가족이 모두 손자를 때리게 했다. 누이와 할머니가 열 대씩 때리게 했고, 자신은 스무 대도 넘게 때렸다. 

◇김홍도의 ‘서당’. 이문건은 9세 손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직접 뒤통수와 엉덩이를 때렸다고 양아록에 기록하고 있다.
#4. “운명이 박하니 그 한을 어찌 감당할고?”


하지만 손자의 술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은 것 같다. 손자가 14세 되던 새해 첫날 이문건은 “늙은이가 아들 없이 손자를 의지하는데 손자 아이 지나치게 술을 탐하여 번번이 심하게 토하면서 뉘우칠 줄을 모른다. 운수가 사납고 운명이 박하니 그 한을 어떻게 감당할까”라며 손자의 음주벽에 대해 매우 마음 아파하였다. 이후에도 공부 문제, 손자의 태도 문제 등으로 할아버지와 손자의 갈등은 커졌다. 이문건은 ‘양아록’의 마지막 ‘노옹조노탄(老翁躁怒嘆)’에서 손자에게 자주 매를 대는 자신에 대해 “늙은이의 포악함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듯하다”면서 반성을 하면서도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후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면서 손자에 대한 야속함과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였다. ‘노옹조노탄’을 끝으로 이문건은 더 이상 ‘양아록’을 쓰지 않았다. 손자가 이제 장성하여, 더 이상 자신의 품속에 품을 수 없는 존재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손자가 6세 되던 해 쓴 아래의 기록은 이문건과 손자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6월에 이르러 전염병에 걸려 아파할 때 손자는 죽 먹이고 똥 누이는 일을 일일이 할아버지가 해달라고 졸라댔다. 기쁜 마음에 꺼리지 않고 돌보아주니 즐거워하고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밖에 나갔을 때 날이 저물면 곧 슬퍼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 졸려도 자지 않고 안타까워하며 늦게 돌아온다고 원망한다. 집에 들어오면 문 앞에서 기쁘게 맞이하고 펄쩍펄쩍 뛰면서 마음에 있는 말을 한다. 이것이 진정 더불어 사는 것, 한 뿌리 한 가지에서 나온 까닭이다.” 이문건은 최후까지 이러한 관계를 원하지 않았을까?

500년 전 이 땅을 살아간 조선의 선비 이문건이 쓴 ‘양아록’은 거의 유일한 양육 일기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책 속에 담겨 있는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애정과 엄한 교육 방법, 여종의 아이 젖 주기,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천연두, 단오의 그네놀이, 아이들의 음주 문화 등은 조선시대 생활사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다. ‘양아록’은 단순한 양육 일기가 아니라, 조선시대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까지 지니고 있는 명저임에 틀림이 없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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