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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39> 간송미술관서 만나는 겸재의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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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5-26 17:54:48 수정 : 2009-05-26 17: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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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한강… 진경산수의 ‘진수’와 함께 古都 서울 여행을
일 년에 두 차례, 5월과 10월 딱 두 번만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미술관이 있다. 바로 서울 성북구에 자리 잡은 간송미술관이다. 미술관의 규모도 작고 관람체계가 불편하지만 전시회가 열리는 날에는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이곳에 들른다. 무엇보다 정선, 김홍도, 신윤복, 김정희 등 조선 최고 예술인들의 진품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31일까지 보름간 간송미술관은 문을 열었다. 이번 특별전의 주제는 ‘겸재 서거 250주년 기념 겸재 정선 화파’이다.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간송미술관.
◇일제강점기 외국으로 유출될 뻔한 5000여점의 문화유산을 수집한 간송 전형필의 생전 모습.
#1. 간송 전형필과 간송미술관의 탄생


일제강점기 이 땅의 문화유산이 일제에 의해 유린되던 시절, 개인의 몸으로 이를 지킨 사람이 있었다. 간송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14점의 국보와 12종의 보물을 포함한 5000여점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하마터면 영원히 사라질 뻔한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 냈다. 서울 종로4가의 99칸 대가의 집 자손이었던 전형필은 식민지시대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였다. 청소년시절부터 도서 수집에 열정적이던 전형필은 독립투사이자 서예가였던 오세창을 만나면서 삶에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들의 총서를 집필하고 있던 스승의 모습에 전형필은 큰 감동을 받았다. 전형필은 오세창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온 재산을 털어서라도 일제가 빼앗으려는 문화유산을 조선 땅에서 지켜내는 것이었다.

1932년 27세의 전형필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우리의 고서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국보 71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祥節)’(국보 149호) 등 소중한 자료들이 이곳에 모아졌다. 1943년 ‘훈민정음’을 입수한 것은 특히나 극적이었다. 1943년 6월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당시 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1만원을 지불하고 입수했다. 당시 한글 탄압을 일삼던 일제가 알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하여 비밀리에 보관하다가 1945년 광복 후에 이를 공개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자 그 창제 동기가 분명히 밝혀진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본 것에는 전형필의 숨은 노력이 컸다.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는 인왕산 자락 자택에서 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전형필은 일본에까지 가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지금도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신윤복의 그림이 담겨 있는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은 전형필이 일본에서 찾아온 작품이다. 이외에도 고려청자, 조선백자, 김홍도와 정선의 그림, 김정희의 서화 등 최고의 문화재들이 전형필의 손을 거쳐 현재는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전형필은 1929년부터 수집한 고전적과 사화, 불상, 자기 등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1936년 현재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保華閣)을 지었다. 전형필이 사망한 후 그의 유업은 아들인 전성우와 전영우에 이어졌고, 1966년에는 전형필의 소장품을 정리,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 발족되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는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여 우리 문화재의 최걸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2. 진경산수화의 중심, 겸재 정선

이번 특별전의 중심인물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다. 정선은 흔히 조선에 진경산수화풍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산천이 아닌 조선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진경시대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를 이루어낸 시기이다. 대개 숙종시대부터 영조시대까지인데 정선이 활동한 영조대는 진경시대 중 최고의 전성기였다.

◇겸재 정선 ‘경교명승첩’의 ‘청송당’.
정선은 아버지 시익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현재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북악산 서남쪽 기슭에서 태어났다. 정선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와 같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은 것은 그의 근거지가 바로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다. 정선은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안동 김문은 그를 후원했고, 정선은 감사의 뜻으로 김문의 주거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렸다. 청풍계는 정선의 그림 중에도 가장 걸작으로 손꼽힌다, 현재에도 청풍계가 위치했던 곳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청운초등학교 건너편 어느 주택 안 담벼락에 남아 있는 이 글씨에서 청풍계의 옛 자취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가 있다.

정선은 안동 김문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던 영조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고 한다. 1733년 영조는 정선을 경상도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청하현감으로 임명했다. 정선의 나이 58세 때였다. 65세 때에는 현재 서울에 편입된 경기도의 양천현령에 임명되어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다. 1747년에는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후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남겼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정선은 80세 이상 장수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붓끝에서 조선의 산하가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그가 80세를 넘길 즈음에는 거의 모든 집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 정선의 위상이 높아졌다. 정선은 ‘인왕제색도’나 ‘금강산전도’와 같이 우람하고 힘찬 산수화는 물론이고 섬세한 붓 터치가 돋보이는 ‘초충도(草蟲圖)’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정선을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후기 3대 화가로 손꼽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3. 정선이 그린 300년 전의 서울 풍경들


정선이 그린 그림 중에는 18세기 한양과 그 주변 풍경을 담은 그림들이 돋보인다. 인왕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인곡유거(仁谷幽居)’와 이곳에서 쉬고 있는 정선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를 비롯하여 ‘백악산’ ‘대은암’ ‘청송당’ ‘자하동’ ‘창의문’ ‘백운동’ ‘필운대’ ‘경복궁’ ‘동소문’ ‘세검정’ 등은 300년 전 서울의 풍경화 그 자체이다. ‘청송당’의 그림에 그려진 큰 바위는 현재 경기상고 안에 그대로 남아 있어 정선의 그림이 진경산수임을 실감나게 한다.

제목 그대로 서울과 주변의 명승을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양의 주변 지역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양수리 부근에서 한양으로 들어와 행주산성까지 이르는 한강과 주변의 명승지가 30여점의 그림으로 형상화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림을 그린 배경도 흥미롭다. 65세인 1740년 정선은 양천현령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벗 사천 이병연(李秉淵:1671∼1751)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다. “그대가 시를 지어 보내면 나는 그림을 그려 화첩(畵帖)을 만들겠다.” 그리고 제안은 결국 1741년 ‘경교명승첩’ 2권으로 완성을 보았다. 이 화첩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던지 정선은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千金勿傳)”는 인장(印章)까지 남겨 두었다.

◇겸재 정선 ‘경교명승첩’의 ‘시화상간도’는 오랜 벗인 겸재와 사천 이병연이 마주앉아 시와 그림을 주고받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경교명승첩’은 한강 상류의 절경을 담은 ‘녹운탄(綠雲灘)’과 ‘독백탄(獨栢灘)’에서 시작한다. ‘탄’은 ‘여울’이란 뜻으로, 현재의 양수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한강 상류에서 시작한 그림은 현재의 서울 중심으로 향한다. ‘압구정(狎鷗亭)’은 조선초기 세도가 한명회의 별장 주변을 담은 그림이다. 그림의 중앙부 우뚝 솟은 바위 위에 별장이 위치하고, 백사장이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이나 돛단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와는 너무나 다른 평화로운 풍경들이다.

‘광진’과 ‘송파진’, ‘동작진’의 그림들은 18세기에 이 지역이 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작진’에는 18척의 많은 배가 그림에 등장하며 바다와 강을 왕래하는 쌍돛대를 단 배도 등장하고 있다. 물화(物貨)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한강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행호관어(杏湖觀漁)’에는 고깃배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행호’는 지금의 행주산성 앞 한강으로 이 일대에 많은 고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강의 명물이었던 웅어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류하는 곳에 살았으며, 웅어는 그 맛이 뛰어나 왕에게 진상하는 물품으로 사용되었다. ‘행호관어’에는 웅어가 뛰어놀았던 한강의 운치가 느껴진다.

남산의 풍광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은 이병연이 보내온 ‘새벽 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 떠오른다’는 시에 맞추어 남산에 떠오른 일출의 장관을 그린 것이다. 정선과 이병연이 약속한 시화상간(詩畵相看:시와 그림을 맞바꾸며 감상함)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2009년 5월에도 간송미술관에서는 300여년 전 조선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겸재 정선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뛰어난 필치와 사실적인 묘사는 당시의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하게 한다. 정선이 살았던 인왕산과 북악산 주변 한양의 그림들과, 배를 타고 가면서 그린 한강의 수려한 풍광들은 한강과 서울 교외의 모습들을 생생히 복원하고 있다. 진경산수화의 백미 정선의 그림들과 함께 600년 고도 서울과 한강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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