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반해 문명화한 세계에서, 인간의 잔혹성은 복잡한 사회현상에 밀폐되어 있거나, 전쟁과 같은 집단적 폭력성에 가려져 있지만 훨씬 더 참담한 실상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인간 ‘잔혹성’의 근저에는 ‘탐욕’이나 ‘복수’와 같은 심리적 동인이 훨씬 강하게 수반돼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악마를 보았다’를 둘러싼 ‘잔혹성’ 논란은 이 영화를 평가하는 데 그다지 본질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지금 이곳이, 영화에서 극적으로 표현된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본질적으로는 더 잔혹한 세계일 수 있어서다. 우리들이 매일 같이 목도하는 현실은 인간 존엄과는 무관하거나 반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이며, 간혹 잔혹한 영화보다도 더 실감나는 현실이 우리들에게 펼쳐지기도 한다.
이 영화에 대해 제한 상영 판정을 내렸던 영상물등급위원회의 과도한 우려는 사실과 다르다. 이 영화가 현실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 상상력은 결국 현실의 바탕 위에 있는 것이고, 감독 말처럼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기” 때문에 영화의 잔혹성만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이러한 잔혹성 논란을 뒤엎을 만큼의 강렬한 영화적 감흥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의 패륜적인 탐욕과 무자비하게 짓밟힌 아내를 위한 복수의 논리들은, 영화 초반부터 후면으로 사라지고 폭력의 본류만 낭자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와 뱃속 아이를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잃게 된 수현의 절망감과 분노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나, 복수를 위한 악마적 동질성에는 관객들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심연의 강이 놓여 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을 계속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게 된다”는 니체의 경구를 고려했다는 감독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그 심연에는 보편성이 결여돼 있다.
수현의 감정선과 경철의 동선을 따라 관객의 정서가 몰입되기를 바랐다는 감독 의도 역시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공적이 아닌 사적인 영역의 복수 감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수의 논리에 대한 공감 여부이다. 국가나 공동체, 혹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파토스를 유도해도 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의 복수 감정은 고뇌와 갈등이 전제되지 않고 확고하게 무장돼서는 곤란하다. 극중 수현을 통해 표출하려 했던 복수의 피로감에 대한 묘사 또한 현란한 액션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절제돼 있다.
김지운은 한국 영화계에서 누구보다도 영화 자체의 미학에 충실한 감독이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 ‘달콤한 인생’ 같은 전작은 물론이고 이번 영화도 그러하다. 영화의 기교적 완성도는 탁월한 수준이다. 두 ‘악마’를 연기한 이병헌과 최민식에게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을까. 특히 5년 만에 스크린에 나타난 최민식은 징그러울 정도로 능숙하다.
하지만 최상의 감독과 최고 배우가 엮어내는 ‘악마를 보았다’는 ‘악마’를 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좀더 덜 능숙하게, 덜 완성되더라도 영화가 끝난 후 다시 그 영화를 음미할 여유를 남겨주기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욕심이 아니라면 단순한 개인의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교사·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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