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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10> 광산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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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6-21 22:36:53 수정 : 2011-06-21 22: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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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자 김흥광이 시조… 한국 최고의 명문거족 중 하나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이 자리를 잡고, 8명의 평장사가 배출되었다는 담양군 평장동 평장사 전경.
# 광산김씨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신라계 김씨에서 경주 김씨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성관이다.
광산김씨의 유래는 신라 왕자의 하나로 알려진 김흥광(金興光)이 광주지역(광주시 서일동과 담양군 평장동)에 자리 잡으면서 ‘광산’이라는 본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주요 문벌 중의 하나로 꼽히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을 이끌어가는 인재의 산실, 삼한 갑족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8명의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5명의 정승과 대제학(大提學)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하였다. 또한 조선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부자가 동국 18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현재도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는 김해김씨·전주이씨·밀양박씨·경주김씨·경주이씨·경주최씨·진주강씨 다음으로 8위에 속하며, 인구는 83만7000명이다(2000년 인구센서스, 통계청). 

신무왕묘.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은 신무왕의 셋째 아들로 전해진다. 신무왕은 경주에서 왕위 다툼에 패해 장보고에게 의탁했다가 장보고의 힘을 빌려 민애왕을 죽이고 45대 왕에 등극하지만, 6개월 만에 죽었다.
# 광산김씨의 시조와 유래

앞서 거론했듯이 광산김씨는 신라의 왕자 김흥광이 신라 말기 혼란스러운 경주를 피해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시)에 터전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흥광이 신라의 왕자 출신이라는 것은 고려 충렬왕 때 제안황대전고(提按黃臺典誥) 벼슬을 지낸 김이(金珥)의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에 나온다. 그 문건에 의하면 “이 고을은 신라 때 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왕궁을 버리고 서인이 되어 이 땅 서일동에 와서 사셨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광산김씨의 시조 김흥광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가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설(정유대동보)과 다른 하나는 49대 헌강왕의 아들(동국만성보, 조선씨족통보)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두 번째 가설은 신빙성이 높지 않다. 왜냐하면 신라 49대 헌강왕 시대에는 한두 건의 반란은 있었지만, 서울인 경주는 기와집에 숯으로 밥을 하는 대단히 화려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토록 화려했던 경주에서 왕자가 혼란을 피해 무주로 숨어들어 은거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흥덕왕 사후,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희강왕과 다투다 패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가, 장보고의 힘을 빌려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45대 신무왕의 이력을 볼 때, ‘광산현제영시서’의 글과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왕위에 오른 신무왕이 6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은 문성왕시대에도 친족 간의 왕권다툼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첫 번째 주장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광주에 자리를 잡은 김흥광은 그의 아들 김식(金軾)이 각간에 오르고, 손자 김길(金吉) 때에 고려에 귀의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광산부원군으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고려시대에 대대로 8명의 평장사(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급)를 배출함으로써 ‘평장동’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광산을 본으로 삼은 때는 광산부원군으로 책봉된 고려 초기 이후로 판단된다.

하지만, 광산현제영서와 다른 기록도 보인다. 즉,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김양감(金良鑑)의 아들 김의원(金義元) 묘지명에 쓰여 있는 나주광양현인(羅州光陽縣人)이라는 금석문이 있다.

이로 인해 이수건 교수 등은 광산김씨가 광주의 토성으로 있다가 고려 말에 가문을 일으키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뒤, 광양김씨 선계에 자신을 이어 붙인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운다(고려토성연구 上). 그러나 이 주장은 고려시대 성관의 의미가 확고하지 않았으며 어떤 때는 출생지를, 어떤 때는 본관을 기록하는 경우가 함께 존재했고, 광산김씨가 인구도 많지 않고 뚜렷한 명문가문도 아닌 광양김씨에게 세계를 이어붙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쉽게 납득되지 않는 가설이다.

 
김장생은 이율곡의 제자로서 조선 예학의 태두이다. 그의 아들 김집과 함께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윤증 등 기호학맥의 본거지를 형성했다.
# 광산김씨의 분파와 갈래

김흥광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는 세계를 내려오면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중 광산김씨 내에서는 양간공파·낭장공파·문숙공파·문정공파·문원공파·사온직장공파 등 6개 파가 생겨났고, 각 파는 또다시 수많은 지파로 나뉘어졌다.

아예 새로운 성이나 본관을 만들어 나간 파도 적지 않다. 그중 하나로 김흥광의 31세 손이면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장군을 시조로 하는 용안김씨(龍安金氏)가 있다.

용안김씨는 김덕령 장군이 무고로 옥사를 하고 부인도 자결을 하자, 홀로 남은 아들 김광옥(金光沃)이 전북 익산군 용안면에서 은거하다, 외숙인 이인경의 임지인 평안도에 가서 정착한 데서 유래한다. 현재 인구는 50가구 244명(1985년 인구조사)으로 서울과 부산 등에 거주하고 있다.

그 외 은진김씨(恩津金氏)도 있다. 은진김씨의 시조는 김전개(金田槪)이다. 그는 광산김씨 별파인 감찰어공파의 사람으로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판관이 되었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그의 본관이 광산이고, 후손들의 분포지는 관서지방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후손들이 은진(논산시)에서 관서로 이주한 것 같다.

이들은 평안북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서울 경기 등에 89가구 53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시조 김흥광의 14세 손 김경량의 아들인 김수(金須)를 시조로 하는 초계김씨(草溪金氏)가 있다. 문과에 급제한 후 영암부사로 간 그는 삼별초군이 제주에 몰려들자 부하들과 제주를 지키려다 전사했다.

그 후손들이 광산김씨에서 분파한 후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충남과 서울, 부산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은 총 189명(1985년 인구조사)으로 파악되었다.

또 다른 분파로 보령김씨(保寧金氏)가 있다. 보령김씨는 중종 때 예조판서를 역임한 김극성(金克成)을 시조로 하는 파와 김극성 후손으로 병조정랑을 지내고 보령에 정착한 김억적(金億積)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 보령김씨는 남한에 579가구 24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조선 명종조에 장례원 직장을 지낸 김태진(金泰辰)을 시조로 하는 남해김씨(南海金氏)가 있다. 김태진은 광산김씨 문숙공하 판도판서공파인 김극신의 증손인데, 연산군의 혼정을 탄핵했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이후 어찌된 연유인지 몰라도 남해에 정착하게 되었다. 후손들은 경기 김포와 서울 성동구 일원에서 살고 있다. 남해김씨의 인구는 총 539명(1985년 인구조사)이며, 주로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청거김씨(淸渠金氏)가 있다. 청거김씨의 시조 김승진은 김흥광의 16세손으로 화평군에 봉해진 충숙공 김심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상호군을 지내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광산김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청거(진안군 속면)로 정한 것 같다. 그외에도 김남우(金南雨)을 시조로 하는 무주김씨(茂州金氏), 김천리(金天利)를 시조로 하는 무풍김씨(茂豊金氏) 등도 광산김씨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구체적인 분적 기록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광산김씨에서 아예 성씨를 바꾼 성관도 존재한다. 사씨(舍氏)가 그들이다. 사씨는 원래 광산김씨였는데, 10대조 김극윤(金克胤)이 사씨로 개성하였다고 전한다.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한 사씨는 1985년 조사 때는 23가구 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천주교 개혁에 헌신했으며, 민주화운동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족적을 남긴 故김수환 추기경.
# 광산김씨의 연혁과 인물

광산김씨는 김흥광의 10세 손인 김체의 아들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의 형제 대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산맥을 이룬다.

김광세의 후손으로는 삼별초의 난에 순절한 대장군 김경량이 있고, 세조 때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김성원이 있으며, 손자인 김구(金絿)는 조광조와 함께 혁신정치를 도모하다 사사된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속한다. 특히 김구는 필법과 문장에 뛰어났다. 그로 인해 그가 살던 인수방 마을 이름을 딴 인수체(仁壽體)라는 필체가 생길 정도였다.

김광존의 후손을 보면, 그의 고손자 김진이 대제학에 올랐고, 김정의 아들 김약채(金若采) 이후 광산김씨의 화려한 명맥이 이어졌다. 김정은 추성보리공신에 책록되고, 벼슬은 중대광(重大匡, 종1품)에 이르렀고, 광성군에 봉군되었으며, 김약채·김약항·김약시 등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특히 김약채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 자리를 잡아 훗날 기호학맥의 본거를 형성하는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 등을 배출하였다. 김장생에서 시작된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와 견주며, 조선 학맥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사계 김장생의 단일 후손에서는 7명의 대제학이 배출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가례집람(家禮集覽) 3권, 경서변의(經書辯疑) 8권 등 총 21권의 저서를 남긴 김장생은 조선 예학의 최고봉을 이룬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아들인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윤증으로 전승되어 조선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본인은 아들과 함께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에 배향되었으며, 안성의 도기서원과 연산의 돈암서원 등 10여개 사원에 제향되었다.

숙종조에 들어와서 인경왕후(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김만기와 서포 김만중(金萬重)은 형제가 모두 대제학에 올라 명성을 드높였는데, 그중 김만중은 효심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지은 구운몽(九雲夢)도 귀양살이로 인해 어머니 곁을 떠나 있게 된 상황에서 어머니의 시름을 달래주려는 의도에서 지은 순 한글 소설이다. 그외 그의 저작으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등이 전해진다.

이렇듯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광산김씨는 한국사회에서 최고의 명문거족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조선시대 광산김씨에서 배출된 인물만 하더라도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인경왕후)이 있고, 조선시대에 문과 269명, 무과 7명, 사마시(생원 진사를 뽑는 과거) 275명, 역과(번역관) 15명, 의과 4명, 음양과(천문 지리)에 1명, 율과(잡과 중 하나)에 1명, 주학에 19명 등 584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현재도 수많은 인물이 광산김씨에서 배출되고 있다. 최근 작고한 김수환(金壽煥) 가톨릭 추기경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출생하여 1951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며, 추기경으로 재직하면서 한국 천주교의 개혁에 헌신하고 민주화 운동과 서민을 돌보는 데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외에도 꽃을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한 김춘수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황식 총리 등이 있으며, 김숙희(전 교육부 장관), 김하중(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장수(전 국방부 장관) 등과 김대중(조선일보 전 주필), 김용옥(철학과 교수), 김희수(김안과 병원장, 건양대 초대 총장), 김택수(전 국가대표 탁구선수), 김용건·김아중(영화배우) 등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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