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리더쉽·메세지… 외국어 남발에 표기도 틀려
국립국어원 지적에도 제재·처벌 수단 없어 매년 반복 “이사회는 24명의 이사로 구성되며 컨센서스로 의사결정…”, “보관 자료를 제출받아 표본 크기, 추출방법, 설문내용, 응답률 등을 심사·분석…”.
지난 6월 외교부가 작성한 한 문서는 ‘의견일치’ 등 우리 글로 풀어 쓸 수 있는 것을 ‘컨센서스’라는 외국어로 적는 등 부적절한 표현을 곳곳에서 사용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7월 발표한 보도자료에는 ‘응답률’이 ‘응답율’로 잘못 표기돼 있었다. 받침이 있는 말 다음에는 ‘∼률’로 표기하고, 모음이나 ‘ㄴ’ 받침 뒤에서는 ‘∼율’로 적어야 한다는 중학교 수준의 문법도 지키지 못한 셈이다.
국립국어원이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59개 공공기관이 작성한 보도자료 587건을 분석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말 그대로 엉터리 수준이었다. 한글맞춤법은 물론이고 띄어쓰기, 외래어·외국어 남용, 어휘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심각한 오류를 드러냈다.
◆한글날 행사 공문도 문법 틀리는 공공기관
지난해 한글날을 맞아 국무총리실에서 내놓은 행사 보도자료에서조차 무려 20개의 어법에 어긋난 사항이 나타났다. 이날 김황식 전 총리의 덴마크 행사 관련 보도자료에는 “어디에 가든 ‘들으려 왔다’며 경청의 리더십을 보여줌으로써…”라고 썼다. 하지만 ‘들으려’는 ‘들으러’나 ‘들으려고’로 바꿔야 한다.
이 문서에서는 한글맞춤법 및 표준어규정 위반이 2곳, 부적절한 띄어쓰기가 12곳, 조사를 잘못 사용하거나 연결어미를 잘못 사용하는 등의 비문이 4곳, 우리말답지 않은 표현과 어려운 표현이 1곳씩 나타났다. 국무총리실은 지난해 10월 보도자료에서도 ‘바라다’의 활용형인 ‘바람이다’를 ‘바램이다’라고 잘못 적었다.
이 외에도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공공기관 문서 오류 사례에는 중학생도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의 내용이 수두룩했다. ‘녹색을 띠고’라고 해야 할 문장을 ‘녹색을 띄고’라고 쓰는가 하면, 간접적 증거로 증명한다는 뜻의 ‘방증’이 올 자리에 반대되는 근거를 들어 증명한다는 뜻의 ‘반증’을 사용하기도 했다.
외국어를 남발하면서 표기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사례도 많았다. ‘콘텐츠’를 ‘컨텐츠’라고 표기하거나 리더십을 ‘리더쉽’으로 쓰고, 문자메시지를 ‘문자메세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원조해 주고 원조를 받는 국가’라는 쉬운 표현을 두고 ‘공여기관 및 수원국’이라는 정체불명의 문장을 쓰기도 했다.
◆진단만 있고, 처방은 없는 엉터리 공공언어
국립국어원은 지난해에도 공공기관 57곳의 공문서 570건을 분석해 5756개의 오류를 적발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적에도 공공기관 문서의 어문규정 오용은 매년 반복되고 있다.
국립국어원은 공공기관의 올바른 국어 사용을 위해 2009년 12월부터 매년 ‘공문서 바로쓰기’ 지침서를 각 공공기관에 배포하고 있다. 지침에는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문장의 마지막을 명사가 아닌 서술어로 마쳐야 한다’, ‘의존명사 띄어쓰기’, ‘번역투 문장 피하기’, ‘반드시 한글로 쓸 것’ 등의 당부사항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일선 공무원들이 국립국어원의 지침서를 바탕으로 문서를 작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부산시청에 근무하는 기술직 공무원 A씨는 “‘공문서 바로쓰기’와 같은 지침서를 본 적도 없다”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면서 외운 어문규정은 되도록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보고서 등을 작성할 때마다 이를 검토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고백했다.
한글날을 이틀 앞둔 7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개막된 ‘한글 멋글씨전’을 찾은 시민들이 전시된 다양한 한글 글씨체를 구경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
민현식 국립국어원장은 “관공서 업무가 전문화·세분화하면서 전문용어를 한글로 풀어 쓰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중앙부처에 비해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우 이 같은 경향이 두드러진다”며 “공공기관장의 어문규정 준수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재호기자 futurnalis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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