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울분 표현보다 정제된 예술미 절실 민주화 투쟁 시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걸개 그림 하나가 미술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광주 비엔날레가 창설 20주년을 맞아 본행사 개막(9월5일)을 앞두고 마련한 특별전에 내걸릴 작품 하나를 전시 유보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풍자한 부분이 문제가 됐다. 과거 민중미술이 풍미하던 시절 갑론을박의 풍경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이 사태를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다. 세월호 사고 이후 정치권 등 우리 지도층이 보여 준 처참한 행태들이 다시금 민중미술을 호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는 늘 걸개그림이 등장했었다. 투쟁의 최전선인지라 표현도 거칠고,직설적이고 전투적이었다. 미학적 논의는 차후의 일이었다.
‘광주 정신’을 승화한다는 차원에서 마련한 이번 특별전에 초대된 독일 판화가 케테 콜비츠(1867∼1945)는 이런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게 해준다. 여성 작가인 그는 1차 세계대전엔 아들을, 2차 세계대전엔 손자가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겁먹고 놀라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의 세 아이를 두 팔을 벌려 품에 안고 있는 작품은 강렬하다. 적의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우리가 전쟁에 내보내려고 아이를 낳은 건 아니다”라고 절규하는 듯한 울림이 전해질 뿐이다.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또 어떤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우리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외치는 듯하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모습에서는 기댈 곳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대변이 느껴진다. 민중 판화가들이 그를 모델로 여겼던 이유다. 그 힘은 강한 ‘순수’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했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
한 미술계 인사는 전시를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대립적 양상들의 배경엔 우리 사회 고질병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각각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에 성공한 유산을 가진 이들이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기득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다.
혁명의 완성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서 이뤄진다는 말이 있다. 순수, 진실성의 추구가 그것을 가능케 해준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이 그 출발점이다.
미술도 예외가 아니다.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수없는 자기 부정의 순수가 있어야 한다. 새빨간 색은 꼭 새빨간색으로만 표현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옅은 빨강을 통해 새빨강을 드러내 줄 수 있는 게 미술이고 예술이다. 희미한 빨강으로도 더 감동을 줄 수 있다. 그것이 정제된 예술적 승화다.
중국 명나라 황실의 후예인 팔대산인은 청나라에게 나라가 망한 허탈감과 원한을 그림으로 승화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 어디에서도 거친 울분을 볼 수 없다. 다만 새의 눈을 백안시(흰 눈동자)로 표현함으로써 깊은 울림으로 승화시켰다. 사람들을 그의 슬픔에 더 공감케 했다는 팔대산인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해준다. 이제 우리 사회도 순수가 필요한 시대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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