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퇴임한 이용우(61·사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는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임기를 채우지못하고 물러난 데 대한 진한 아쉬움 때문일까. 세계일보 기자와 만나자마자 첫 마디부터 상기된 채 격정의 말을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표는 광주비엔날레를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1994년 당시 강운태 광주시장의 제안으로 광주비엔날레가 기획되면서 핵심 보직인 전시기획실장을 맡았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광주에 비엔날레를 창립한 것이다. 그런데도 20주년을 맞아 준비한 비엔날레 특별전 때문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임기가 1년 이상 남아 있지만 홍성담 작가의 대통령 희화화 작품이 논란에 휩싸이면서 물러났다.
이 전 대표이사는 예술이 정치에 휘둘리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는 “지방선거 때마다 자치단체 문화시설의 기관장 자리가 논공행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더욱이 선거에 개입한 예술인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젊은 미술가로 촉망받던 20년 전 비엔날레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에서 처음으로 광주에 비엔날레를 열었다. 이는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 비엔날레라는 이름의 각종 예술 축제가 성행하도록 촉진시킨 배경이다. 순전히 이 대표의 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광주비엔날레가 세계 5대 비엔날레에 선정될 정도로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국제공인기관에서 세계 비엔날레 200여개를 대상으로 한 평가에서 5위를 차지한 것이다. 더욱이 아시아지역 비엔날레에서는 최고의 성적이다. 20년 만에 이 같은 성적을 올린 데는 이 전 대표이사의 역할이 컸다. 그는 2004년 광주비엔날레 10주년을 맞아 예술총감독을 맡으면서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 광주비엔날레는 2007년 총감독으로 선임된 신정아씨의 가짜학위 파문으로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는 다음 해인 2008년 재단의 상임부회장으로 돌아와 광주비엔날레를 살리는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2012년엔 대표이사가 됐다.
이 전 대표이사는 광주비엔날레의 고속성장에는 광주정신의 세계화가 한몫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정신을 기반으로 다양한 담론을 생산하고 교류하는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며 “광주비엔날레는 단순히 현대미술을 보여주는 전시장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 미술인들의 광주비엔날레 참여를 어떻게 조정하느냐가 남은 숙제라고 진단했다. 광주비엔날레의 국제적인 경쟁력 유지를 위해서는 ‘광주’를 벗어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지역 미술인들이 참여하지 않는 광주비엔날레는 의미가 퇴색한다는 점도 인정했다. “20년간 광주지역 작가들의 참여율을 8% 이상 보장해왔습니다. 이는 총감독에게 전권을 주는 다른 비엔날레와 다른 점입니다” 지역 예술인들을 대우한다는 의미다. 이어 광주비엔날레가 양적인 성장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그동안 질적인 분야에 중점을 두면서 어느 정도 결실을 거뒀다”면서 “이런 질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관람객 확보와 후원자 모집 등 양적인 성장에 진력해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 광주비엔날레의 성장 비결로 행정의 불간섭을 꼽았다. 역대 광주광역시장들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창작에는 간섭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과거엔 지금의 상황과는 사뭇 달랐다는 뉘앙스다.
광주=한현묵 기자 han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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