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희망·아름다움 자신만의 맥락 필요 새해 첫날 아침 책을 펼쳐 들었다. 지난 연말 한 갤러리 대표가 송년 편지와 함께 보내 준 책이다. 상투적인 송구영신의 문자메시지가 난무하는 시대에 각별하게 다가왔다. 책 제목은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이다.
왜 이런 책을 보내줬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책장을 꼼꼼히 넘겨 봤다. 종반에 프랑스 명기 ‘플레옐 그랜드피아노’ 얘기가 등장한다. 이런 고급 그랜드 피아노의 캐비닛을 만드는 데 물푸레나무와 너도밤나무가 흔히 쓰인다는 사실도 소개된다. 책 속에 등장하는 공방 주인은 물푸레나무를 ‘고귀한 나무’라고 칭송까지 한다. 수레의 하중을 감당하는 민감한 부분에 쓰였고,곡선 형태로 만들어도 그 훌륭한 구조적 완결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바로 이 점이 그랜드 피아노에서는 필수적이라 했다. 책의 골격은 미국인 주인공이 공방 주인의 이끌림에 의해 피아노 세계에 빠져드는 이야기다.
갤러리 대표는 편지 속에서 나름의 책에 대한 친절한 감상 소회를 드러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책에서는 그 대상이 피아노이지만 피아노를 ‘사랑하는 대상’으로 치환시켰다. 중년의 주인공이 파리 시내의 작은 피아노 공방에서 만난 중고 피아노에 애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피아노 한 대가 어느덧 그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아가며 이웃과의 소통의 매개가 되고 위안과 자존감을 주는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잔잔하게 풀어내고 있다고 평했다. 한 미국인이 파리라는 낯선 공간에서 피아노는 파리지엥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 셈이다. 어쩌면 망각했던 ‘자신’과의 재회였는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파리 외곽 피아노 제조 공방들은 모두 사라졌다. 지금은 수리공방들만 옛 자취를 짐작케 할 뿐이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피아노 제조회사 ‘아뜰리에 플레옐’이 파리 교외 생드니에 있는 공방에서 피아노 생산을 2년 전 중단했기 때문이다. 플레옐은 200여년 전 요제프 하이든의 친구이며 음악가이자 작곡가인 이그나스 플레옐이 설립한 회사다. 1831년 창업자가 사망한 후, 아들인 카밀 플레옐이 회사를 넘겨받아 유럽 왕족들에게 피아노를 판매했다.
갤러리 대표는 책과 함께 ‘정명훈의 피아노 모음곡’ CD 한 장도 동봉했다. 세계적인 지휘자가 자신의 둘째 아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앨범이다. 손녀와 누이를 위한 주옥 같은 소품들과 젊은 날 자신의 콩쿠르 곡들로 채워져 있다. 건반을 어루만지는 듯한 그의 연주는 무척이나 유려하고 따스하다고 갤러리 대표는 편지에 썼다. 지나간 아쉬운 시간들과 기억들에 대한 망각의 위안이 아닌 사색할 수 있는 위안을 주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편지 말미엔 이렇게 적고 있다. 책 주인공에게 있어 피아노는 잊혀졌던 꿈과 열정으로 가는 비밀의 문이었고, 정명훈에게 피아노는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고 자신을 믿고 응원해 준 가족과 애호가들에게 보답할 수 있도록 한 오래된 친구였다고.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
새해 인사 문자 답신하느라고 요 며칠 모두가 분주했다. 일방적으로 대량 뿌려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무시할 수도 없어 손가락 수고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문자 공해라는 얘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한 갤러리 대표의 편지는 그런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케 해준다. 사랑 열정 위안 보답이라는 키워드를 잔잔하게 가슴에 젖어들게 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니 나도 한다는 ‘맥락’에 빠지기 보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상대와의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가는 것만큼 생산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나만의 맥락을 만들어 가는 것에서 창조가 이뤄지고 감동을 주게 마련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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