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한 전망
1919년 3월1일, “조선의 자주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3·1 독립선언서’는 민족자결·자주에 입각한 독립의 당위성을 분명히 하며 전국을 뒤흔든 ‘독립만세’의 함성을 이끌었다. 독립선언서에는 광복에 대한 굳은 의지, 깊은 염원과 함께 거침없는 논리가 응축돼 있다.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김교헌 등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
1919년 3월19일 일본 오사카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유명한 소설가 염상섭이 작성한 것이다. 그는 “우리 한국은 4300년의 존엄한 역사를 가졌고, 일본은 한국에 뒤처지기를 1000여년이다. 이 사실만 보아도 조선 민족과 일본 민족은 하등 서로 관련된 바 없음을 알 수 있다”고 선언했다.
◆결의 그리고 희생
처참한 현실에 대한 울분,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은 때로 목숨을 요구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가 지배한 하늘 아래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언제든 직면할 수 있는 죽음에 의연히 맞섰다. 을사늑약 체결 후 처음으로 자결 순국한 민영환은 가로 6.2㎝, 세로 9.2㎝의 작은 명함에 유서를 남겼다.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기어이 도우리니…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며 자신의 죽음을 고했다. 그는 명함을 포함해 세 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하나는 일제의 침략을 적시하며 서울 주재 외국사절에게 한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나머지 하나는 황제에게 올렸다.
문용기의 두루마기 |
죽어서도 일제 탄압받은 권오설의 철관 |
독립운동가의 거대한 행적에 압도되면 그들의 일상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 역시 생활인이었고, 일상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이 남아 애틋함을 더한다.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에는 조카를 향한 유관순의 살가운 애정을 보여주는 모자가 있다. 1917년 사촌인 유경석과 노마리아의 아들 유재광에게 직접 뜨개질을 해 선물한 것이다. 여성적 섬세함이 또렷한, 단아한 모자에서는 그녀가 맞닥뜨려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읽어낼 수 없다.
유관순이 조카를 위해 직접 뜬 모자 |
신흥무관학교, 경학사 등을 세워 독립군 양성에 힘썼던 이회영은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갖고 있었다. 특히 난을 즐겨 그렸는데 필치가 흥선대원군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회영은 1910년 망명을 떠나면서 제자이자 동지인 윤복영에게 난을 그린 부채를 전했다. 고고한 난과 함께 ‘蘭以證交’(난이증교·‘이 난초로 사귐의 증표를 삼는다’)라 써넣었다. 4점의 묵란도는 미술사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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