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완성하기까지 18년이나 걸려…특권층 장악 유럽 현실에도 시사점
힐러리 맨틀 지음/이희재 옮김/교양인/각 1만8000원 |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절대왕정을 공화정으로 바꾼 세계사적 사건이다. 프랑스인들은 지금도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혁명은 민중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세 명의 젊은 혁명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조르주자크 당통, 카미유 데물랭이 선두에서 민중을 이끌면서 왕정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후세 사가들은 이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공포정치가’라는 섬뜩한 이름을 붙였다.
영국 여성작가 힐러리 맨틀은 역사소설 ‘혁명극장’을 통해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한 이들 혁명가를 파헤친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이야말로 프랑스의 진정한 공화주의자였다고 말한다. ‘혁명극장’은 영국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받은 유명작가가 집필했기에 주목받는 작품이다.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하기까지 18년이 걸렸다. ‘1789년의 격동적 사건에 21세기의 감각을 불어넣은 작품’이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혁명극장’은 프랑스혁명을 이끈 세 명의 젊은 혁명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왼쪽부터), 카미유 데물랭, 조르주자크 당통의 우정과 투쟁, 갈등을 다룬 역사소설이다. 교양인 제공 |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 보낸 냉혈한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부패할 수 없는 자’라고 불릴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했다. 저자는 이것은 로베스피에르의 일면만 본 것이라고 지적한다. 소년 시절 로베스피에르는 모범생이었지만 가난하고 고독했다. 어느날 그에게 특별한 친구가 생겼다. 파리의 명문 학교 루이르그랑 콜레주에서 만난 영리한 소년 데물랭이었다. 데물랭은 프랑스혁명 당시 비스티유감옥 습격을 이끌었다. 파리 언론도 주도했다. 죽마고우인 두 사람에게 당통은 단두대까지 함께 오른 혁명동지였다. 당통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현실적이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다. 청중을 사로잡는 호소력 있는 연설과 결단력, 특유의 카리스마로 혁명의 격랑을 헤쳐갔다.
이 소설의 원제는 ‘더 안전한 곳(A Place of Greater Safety)’이다. 무슨 의미인가. 혁명 직전이던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왕과 귀족 같은 소수 특권층만이 안전한 세상이었다. 왕이 거액을 받고 서명한 체포장이 있으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쉽게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
전쟁으로 식민지를 넓혔지만 과실은 왕을 비롯한 소수에게만 돌아갔다. 귀족들은 호화생활을 즐겼다. 반면 대다수 국민은 늘어난 국가의 빚을 갚느라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했다. 파리 뒷골목은 거지들로 넘쳐났다. 민중에게 ‘더 안전한 곳’은 무덤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와 친구들은 카페에서 혁명을 꿈꿨다. 언론을 통해 민중의 마음을 얻었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건 민중이 잘사는 안전한 사회였다.
저자는 이 작품으로 ‘역사소설을 재창조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소설은 보통 다큐멘터리 성격을 띠지만, 이 작품은 영화와 비슷하다. 혁명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앞둔 인간의 면모를 세심하게 묘사한다. 저자는 소설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대화와 독백을 통해 독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소설이 ‘작가와 독자의 동업, 협력’을 통해 완성된다고 보는 작가이다. 소설에는 개혁을 주장하다 왕당파로 돌아선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라파예트, 온건파 공화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여성 마농 롤랑 등의 얘기도 나온다.
맨틀은 맨부커상 수상작가답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중한 접근과,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엮어나가는 역량이 뛰어나다. 작가는 역사적 사료로는 알 수 없는 인간 내면을 추적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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