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안 될 일이었다. ‘갑’들은 정부 눈치에, 정부는 용산 눈치에, 용산은 별다른 고민없이 진행한 일이다. ‘을’들만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먹고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그렇게 100여일이 지나 희망은 허망하게 깨졌다. 현실은 달라진 게 없는데, ‘상생안’이란 이름의 결과물이 나왔다. 누구를 위한 ‘상생’인지 알 수 없는, 어쩌면 ‘갑’에게 면죄부만 쥐여준 방안이라는 평가다. 그렇게 배달플랫폼-입점업체 상생협의체는 끝이 났다.
지난 7월23일 정부 주도로 배달플랫폼-입점업체 상생협의체가 발족했다. 플랫폼 업체의 중개수수료로 인한 입점업체 피해가 극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자율규제’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현행 플랫폼업체 ‘2강’인 배민과 쿠팡이츠의 중개수수료는 9.8%다. 중개수수료 문제는 지난 7월 배민이 쿠팡이츠와 같은 수준으로 인상하면서 폭발했다. ‘무료배달’을 앞세운 양사 간 경쟁은 입점업체의 피해로 이어졌다. 소비자에게 ‘무료’를 앞세우며 입점업체에는 수수료를 높이는 방식으로 매출을 극대화했다.
상생협의체는 지난 14일 12차 회의를 끝으로 종료됐다. 정부는 “배달의민족 및 쿠팡이츠의 상생방안이 도출됐다”며 자료를 배포했다. 발표된 안에 따르면 배민배달과 쿠팡배달 모두 중개수수료를 기존 9.8%에서 입점업체 매출액에 따라 차등 인하하고, 배달비는 입점업체 매출액에 따라 최대 500원 인상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상생안은 배민이 협의체에 제시한 방안으로 향후 3년간 시행된다. 양사는 내년 초부터 이 안을 적용·시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도출된 안에 따르면 결국 80%에 달하는 입점업체는 지난 7월 배민이 수수료율을 올리기 전으로 돌아간 수준이다. 여기에 배달비만 올라갔다.
쿠팡이츠는 12차에 걸친 회의 내내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미국에서 주주소송 중인 쿠팡은 한국에서 매출이 줄어드는 의사결정을 내릴 상황이 못 된다. 소송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배민은 “쿠팡이 하면”이라는 발목잡기 전략을 썼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생안은 ‘구멍’투성이다. 3년간 시행하기로 했지만 지키지 않을 경우 제재할 방안은 없다. 여기에 매출액 기준에 따라 나눈 수수료율도 플랫폼업체가 제공하지 않을 경우 검증할 수 없는 구조다. 중개수수료와 배달료 외에 플랫폼사가 입점업체에 부담을 떠넘길 방법은 수두룩하다.
당장 입점업체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협의체에 참가한 입접업체 단체 4곳 중 한국외식산업협회, 전국가맹점주협의회는 최종 회의 과정에서 상생안에 반대해 중도 퇴장했다. 소상공인연합회, 전국상인연합회 등 2개 단체만 배달플랫폼 측의 방안에 동의하면서 만장일치 합의에 실패한 셈이다. 상생안이 입점업체간 ‘갈라치기’를 조장한 꼴이다.
플랫폼 업체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급격히 몸집을 불렸다. 소상공인을 비롯한 자영업자가 플랫폼에 종속된 것도 이때부터다. 각종 ‘갑질’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부는 상생안이 도출됐기 때문에 별도의 입법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상생안은 자율규제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규제를 지키게 하려면 경쟁당국의 강력한 감시망이 선행돼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플랫폼업체의 법 위반 행위를 엄단해야 하는 이유다. 반쪽짜리 상생안이 한시적으로나마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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