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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후 조선·일본, 어떻게 관계 회복 됐나

입력 : 2016-02-11 19:47:59 수정 : 2016-02-11 19:4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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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에도시대 기록 첫 국역 1631년 쓰시마의 번주 소 요시나리와 가신 야나가와 시게오키 사이에 소송이 벌어졌다. 둘 간의 분쟁은 자체적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중앙의 막부가 개입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됐다. 신분제가 엄연한 전근대 사회에서 주군과 가신의 소송이 낯설 수도 있지만 에도시대에 막부까지 개입하는 이런 형태의 소송이 적잖이 있었다. ‘야나가와 잇켄’이라 불리는 분쟁은 시게오키가 요시나리의 지배를 벗어나 중앙으로 진출하려 한 데서 시작됐다. 소송이 끝난 것은 1635년,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유배형의 판결이 내려졌다. 일본 내의 소송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이 국교를 회복해가는 이면의 사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쓰시마번은 일찍부터 두 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교류가 단절되자 재정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후대의 한 학자는 “갓난아이에게서 젖을 뗀 것과 같다”고 할 정도였다. 쓰시마번의 입장에서는 교류 재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고, 조선에 여러 차례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이때 조선 정부는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낼 것, 왜란 와중에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잡아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두 가지 모두 해결이 쉽지 않자 ‘꼼수’를 택했다. 우선 살인범을 왕릉을 범한 주모자로 둔갑시켜 조선에 보냈다. 국서 문제는 아예 서류를 위조했다. 이에 대한 답서 역시 조선이 먼저 보낸 것처럼 위장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쨌든 1607년 통신사행이 성사되면서 국교는 재개되었고 쓰시마번은 목적을 달성했다. 이후 두 번의 통신사행에서도 국서 위조는 반복됐다. 

이런 사정이 야나가와 잇켄을 통해 드러나자 막부는 일본 연호의 사용, 외교문서 작성자의 교대 등의 조치를 취해 대조선 외교를 감시하는 체제를 정비하게 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최근 발간한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사진)은 당시 소송의 전말을 보여주는 기록을 국역한 책이다. 재단 측은 “국내 처음 번역되는 이 기록은 에도시대의 고사료에 역주를 달아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며 “17세기 초반 조일 외교 시스템이 정비되어 가는 과정의 이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강구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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