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최승희인가. ‘전설의 무용가’ ‘세기의 춤꾼’ ‘원조 한류 스타’ …. 한세기를 풍미한 예인 최승희를 가리키는 화려한 수식어들이다. 그는 정주영, 백남준보다 먼저 세계에 한국을 알렸다. 한국인의 혼을 깨운 선각자였다. 최승희는 북한 측 발표대로라면 1969년 8월에 저세상 사람이 됐다. 그 후 우리는 최승희를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한국에서는 친일파, 월북 인사라는 낙인이 찍혀 언급조차 꺼리는 금단의 인물이었다. 북한에서도 숙청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의 사후 이름이 지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런 최승희가 2000년을 전후해 남과 북에서 동시에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 최승희와 그의 예술세계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은 최근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최승희 관련 자료와 사진을 입수했다. 필름을 인화한 원본 사진이 700여 점으로, 이 가운데는 미공개 자료가 절반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30년대 최승희의 친필 문건, 당시 유럽과 미주 각국의 신문 기사 스크랩 등 서지 자료 1600여 점도 대부분 유일·희귀본들이다. 차 이사장은 “이 중에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나아가 처음 듣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며 “이 중 몇 가지 새로운 것을 골라 비화를 공개함으로써 인간 최승희의 진면목을 다시 보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밝혔다.
1930년대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의 한국인 무용수들. 앞줄 왼쪽부터 최승희, 강홍식, 조택원. |
최승희의 일생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변곡점이 몇 번 있었다. 그중 하나가 결혼이었다. 최승희 남편이 안막(安漠, 1910~미상)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본명은 안필승(安弼承)이다. 최승희의 일본인 스승인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의 이름을 따서 결혼 후인 1934년에 개명했다.
1929년 일본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 시절 최승희와 조택원(왼쪽에서 두번째 커플)의 공연 장면. |
최승희를 둘러싼 첫 핑크빛 소문의 주인공은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이었다. 조택원은 최승희와 함께 우리나라 신무용의 개척자로 꼽힌다. 최승희와 마찬가지로 이시이 바쿠 아래서 동문수학한 사이다.
1927년 일본 가고시마 공연을 한 이시이 바쿠 일행.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의 일본인 스승이다. |
이 때문에 시중에서는 “조택원이 최승희에 반해 동경으로 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로서는 돋보이는 청춘 남녀였으니 충분히 그럴 법한 일이었다. 최승희와 조택원은 이른바 ‘내제자(內弟子)’로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서 3년 남짓 공동생활을 했다. 공연할 때 남녀 파트너로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 사이는 무용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최승희가 쓴 자서전이나 편지 등 어떤 글에서도 조택원을 남자로 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조택원도 한 회고담에서 무대 위에서 말고는 “사생활에서는 호흡이 맞지 않았다”고 털어놓고 있다.
1935년 일본 도쿄 에이후쿠초 자택에서 오빠 최승일과 함께 한 최승희. 그는 “성장기에 오빠(최승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
당시 문단을 꽤 떠들썩하게 했던 최승희의 연애담도 있다. 당대 유명한 시인 김영랑이 상대였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대표적 서정시로 꼽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로 시작해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로 끝나는 바로 그 시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
결코 나 혼자 만의 생각이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권위 있는 기록이 있다. ‘한국문학 연구사전’에 따르면 최승희와 영랑은 결혼할 뻔했다. 1925년의 일로, 최승희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인 4학년 때였다.
음력으로 1902년생인 영랑이 23살 무렵이었다. 둘이 사귀기 시작한 것은 1923년 11월 이후였다.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영랑은 당시 간토대지진으로 일시 귀국했었다. 그 길로 학업도 중단하고 고향에 머물면서 문단 일로 자주 서울을 왕래하곤 했다. 그때 교류했던 문단 인사 중에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 1910~미상)도 있었다. 최승일을 통해 최승희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이내 서로 애정이 싹터 사귀는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영랑의 부친이 반대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둘은 결국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에 비관한 김영랑은 자살까지 기도했을 만큼 마음의 상처가 컸다고 한다. “그녀에 대한 추억을 그가 아끼는 모란에 비겨 시로 쓰기도 했다”고 앞서 ‘한국문학 연구사전’에서는 메마른 표현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그녀’는 당연히 최승희를 말한다.
이 시는 1934년 ‘문학’(文學)지에 발표됐고, 1935년에 간행된 ‘영랑시집’(永郞詩集)에 실렸다. 그럴 정도로 영랑에게 최승희와 실연의 상처가 오래 지속됐던 것이다.
최승희가 남편 안막과 결혼한 것은 오빠 최승일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승희는 성장기에 오빠 최승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최승희는 자서(自?)에서 “나의 성격은 승일 오빠로부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빠는 나에게 사물에 대한 정당한 관찰과 이해의 길을 열어주고 가르쳐 주었다”고 말한다.
그 오빠의 영향으로 많이 읽은 시와 소설도 “주로 현실 속을 파고 들어가는 생활 의식이 풍부한 작품”들이었다. 최승희는 “꿀처럼 달고 꿈처럼 헛된 작품들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을뿐더러 아무런 재미를 주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영랑은 카프(KAFP·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와는 대척점에 놓인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시문학파’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이 점을 떠올리면 최승희와 맺어지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도 해석된다.
여기서 엿보이듯 오빠에 대한 최승희의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런 오빠가 안막을 누이동생에게 소개한 것이다. 안막은 최승일과 여러모로 닮아 보인다. 무엇보다 안막과 최승일은 1925년 결성된 카프 동인으로 함께 활동한 동지적 관계였다. 다 아는 대로 카프는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한 조직적인 프로문학을 추구했다.
최승희와 안막이 처음 만난 곳도 당시 카프의 중심 인물이던 박영희의 서재에서였다. 김영희· 김채원 공저 ‘전설의 무희 최승희’에 따르면 처음 대면하던 날 최승희와 안막은 “문학 뿐이 아니라 무용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만큼 둘이 말이 잘 통했다는 뜻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최승희의 삶과 예술에서 안막은 둘도 없는 훌륭한 동반자였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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