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던 위키리크스의 미 국무부 외교전문 폭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내용이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의 발언을 담은 2008년 5월29일자 주한 미 대사관 외교전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역사가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 외교관에게는 현실세계에서 직면한 가장 큰 악몽’으로 불리는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국익을 외치던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대중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얼마나 친미적인 성향을 띠는 지를 여과 없이 노출해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2013년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 알려지지 않은 독일 육사 출신 군 수뇌부들
언뜻 보면 군 수뇌부는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군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수뇌부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 중에는 독일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사람이 적지 않다. 1964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서독 방문 직후 1965년 서독 정부가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한국-독일 육사생도 위탁교육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군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11월29일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과 함께 한미 연합사단을 방문한 한민구 국방부 장관. 국방부 제공 |
지난달 19일 전군 주요지휘관 화상회의를 주재하는 한민구(오른쪽) 국방부 장관과 이순진 합참의장. 국방부 제공 |
1969년 독일로 건너가 3년간 공부한 김 실장은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2년 합참에 근무하면서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지휘관들에게 평시작전통제권 전환 당위성을 설명하는 등 평시작전통제권이 1994년 주한미군에서 우리 군으로 이양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합참의장으로 부임한 그는 국방개혁 2020을 추진하고 한미 동맹 조정을 통해 자주적 방위 태세를 구축하는데 골몰했다. 2012년 12월 연평도 포격도발로 만신창이가 된 군 조직을 추스르기 위해 국방장관에 취임해 “쏠까요, 말까요”식의 대응이 아닌 ‘선조치 후보고’를 강조하며 군에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 장관 시절 ‘원점타격’ 등 강경 발언을 쏟아낸 그는 북한으로부터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다. 박근혜 정권에서도 국방장관직을 수행하다 2014년 6월 국가안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겨 2015년 8월25일 북한 포격도발로 촉발된 남북 군사적 대치를 양측 합의로 해소하기도 했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보수와 진보 3대 정권에서 장관급 직책을 지낸 기록을 갖고 있다. |
◆ ‘미군이 없는 한반도’에 대한 두려움
독일 육사 출신을 포함해 정책분야에서 근무했던 군인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작성한 보고서나 논문들을 보면 무조건적으로 미국에 치우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새로운 한미 동맹체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이 더 많다. 하지만 국민들의 눈에 군의 행동은 친미주의자처럼 보인다. 미군이 한반도에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군 수뇌부에 여전히 남아있고, 이것이 미군에 의존적인 태도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설한지 훈련중인 특전사 대원들. 육군 제공 |
문제는 이같은 체제가 환경 변화에 소극적인 ‘경로 의존성’을 불러일으킨다는데 있다.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우리 군은 미군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아졌다. 무기체계와 조직 등도 ‘상호운용성’을 이유로 미국과 거의 동일해졌다. 미군의 억제력이 제공하는 군사적 안정에 익숙해진 군은 자발적으로 ‘판을 흔드는’ 일에 적극적인 모습을 띠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게 군 외부의 시각이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조건에 기초해 진행한다는 군의 입장이 처음 나왔을 때 “전환할 의지가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던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2014년 9월 17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제6차 한미 통합국방협의체(KIDD) 회의에 앞서 한미 대표인 류제승 국방정책실장(오른쪽)과 데이비드 헬비 동아시아부차관보가 악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우리 군은 어떤가.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미군 전략폭격기가 날아오고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될 것이라는 예측은 국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 힘으로 북한 도발을 억제한다는 결기가 안보인다”는 비판이 뼈아픈 대목이다. 우리나라 군 수뇌부들은 정말 친미주의자일까, 아니면 미국의 힘을 이용하려는 용미(用美)주의자일까. 임진왜란 당시 관군과 의병의 공은 평가절하하고 명나라 군대의 개입은 ‘재조지은’(再造之恩: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이라며 치켜세웠던 조선의 역사가 오늘날 한미 동맹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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