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환경농업교육관. |
물론 귀농 전부터 일찌감치 작목을 선택하고 교육을 받은 뒤 선도농가에서 도제식으로 충분한 실습 후에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섰다면 모르겠지만 지원이 있으니 우선 이용하고 보자는 후배들도 간혹 눈에 띈다. 사실 점잖게 말해 지원이지 다른 자금에 비해 규모가 큰 창업자금과 주택자금은 때가 되면 고스란히 갚아야 할 빚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빚도 자산이라 했고 자산 축적이 어려운 젊은층에게는 창업자금 같은 장기저리 자금이 분명히 기회일 수 있지만, 시골에서 몇 년간 살아본 이라면 빚이 무서운 것이라는 걸 똑똑히 알고 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크게 데어본 농민은 설령 무이자라도 빚을 내길 꺼린다. 게다가 시골에서는 누군가 지역 내 금융기관에서 적지 않은 자금을 썼다면 곧 공공연한 비밀이 되기 쉽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전에 필자도 도시의 아파트를 팔기 전에 지역의 젊은이 중 고액 채무자 순위에 올랐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어디에도 빚이 한 푼도 없다.
농촌에서 빚을 낼 때 도시보다 더욱 신중해야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농업수익률과 수입구조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한마디로 농사를 지어 돈을 벌기가 어렵고 그마저도 기상과 재해의 영향을 크게 받기에 잘못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올해만 하더라도 전반기에 극심한 가뭄으로 마늘과 양파 감자 등이 타격을 받았고, 후반기에는 잦은 비로 생긴 병해로 고추의 생산량이 예년에 비해 큰 폭으로 줄 것이라 한다. 당장 우리집도 보통 대여섯번 따던 고추를 세 번만 따고 모두 뽑아버렸다. 따라서 분명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가능성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 이상 귀농 초기의 대규모 투자는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이다.
체험 관련 공모사업을 유치해 지역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모습. |
이런 까닭에 귀농 교육기관들도 기획안을 잡을 때 개강 초기에 농촌의 현실에 대한 꼭지를 넣는다. 그리고 대부분 해당 교육이 끝나면 교육생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여기저기 한숨소리가 들린다. 최근 전북 순창에서 진행한 교육에서도 농촌에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가 강사가 전한 현실에 실망했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이는 시골행을 결심한 아들이 걱정스러워 자녀와 함께 자발적으로 교육에 참여한 경우였음에도 말이다. 이런 경우에 필자는 아예 대놓고 ‘꿈을 깨러왔다’고 전한다. 가기 전에 실망하는 게 낫지 시골로 이주한 뒤에 실망하면 일이 한층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농촌에서 집을 제외한 생산활동에 적어도 억대가 넘어가는 투자를 할 경우에 가업을 이어받는 승계농을 제외하고는 보다 긴 호흡으로 한 번 더 생각해보시라 권한다. 어차피 창업자금은 5년 내에 신청하면 된다. 대신 이모저모 찬찬히 짚어보되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바로 뛰어들지 말고 가능한 한 같은 작목을 하는 선도농가에서 인턴이나 멘토링 제도를 이용해 충분히 경험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과거 새로운 수입원으로 각광받던 어성초에서 최근의 블루베리까지 이른바 소득작목의 말로는 항상 과잉생산에 따른 폭락의 연속이었다. 결국 유행에 기댄 투자는 묘목장사만 좋은 일 시켜주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빚쟁이가 되는 대출 외에 꿈을 이룰 다른 길은 없을까. 조금 시간이 걸리고 느리지만 행정기관의 시범사업이나 공모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시범사업은 문자 그대로 사업여건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고 파급효과가 큰 농가나 마을을 선정해 일정 비율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대개 시군농업기술센터가 사업을 진행하며 지자체마다 규모는 다르지만 한해 사업비가 수십억원에 이른다. 사업은 센터 내 분야별 공모형태로 이루어지고 최종 사업대상자로 선정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따른다. 관련 교육의 이수 여부와 농가와 마을의 사업여건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농장 사업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평소 체험관련 교육을 받았는지가 중요하고, 농장 여건상 방문객이 교육을 받거나 쉼터 부지가 확보되어 있는지를 점검한다. 특히 사람을 상대하는 사업은 마을과 지역 내 평가도 선정의 변수가 되며 교육 기관의 근무 이력과 자격증도 중시된다. 아울러 평가 항목 중 사업계획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만큼 응모자의 미래 비전 등 사업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적절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우리집 마당에 세운 안내판. 교육농장과 귀농인의 집, 주말농장 사업에 선정됐다. |
우리 부부의 경우 어떤 사업에 응모할 때는 남들과 달리 아주 세밀한 밑그림을 그렸다. 교육농장 공모에 응모할 때는 처음부터 농장 브랜드부터 교육공간과 휴식·편의시설, 프로그램까지 심사관이 사업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선정된 이후에 진행할 단계별 내용까지 기술하여 사업수행 의지가 심사하는 이에게 깊이 전달되도록 했다. 이를 테면 교육농장 개장식 현수막을 날짜만 바꾸면 즉시 출력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식이다. 주말농장 사업에 응모할 때도 비슷하게 대응했다. 텃밭 참여자를 모으는 지역신문 광고를 미리 만들어 계획서에 첨부했다. 심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이들과 확연히 차별화되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공들여 계획서를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사업을 진행하더라도 많은 도움이 된다. 대상자 선정 이후에 세부계획이나 진행 일정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되고 미리 작성한 계획서에 날짜나 시간만 채워서 그대로 쓰면 된다. 즉 어차피 하게 될 일을 조금 앞당겨 작성하면 심사하는 이에게 신뢰를 줄뿐더러 진행할 때도 무척 수월하다. 이런 경험을 살려 귀농교육 시에도 지원 사업을 다룰 때는 유머를 곁들여 후배들에게 이렇게 안내한다. “사업계획서가 심사하는 이의 눈물로 얼룩지게 하라.” 여기서 눈물은 당연히 감동의 눈물로, 아직까지 규모 있는 사업대상자 선정에서 미끄러진 기억이 거의 없다.
홍성 생생아이디어 공모작 수상자들. 가운데가 필자. |
행정기관의 시범 사업은 아쉽게도 새내기 귀농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사업이다. 시범사업의 특성상 여건과 이력이 갖춰져야 응모자격이 주어지는 까닭에서다. 따라서 나중에 도전할 계획이 있다면 미리부터 차근차근 조건과 자격을 갖추다 보면 머지않아 적절한 계기가 오리라 본다. 그때까지 사업 구상을 잘 다듬어서 빈틈없는 계획서를 만들어놓으면 틀림없이 기회가 올 것이다.
시범 사업과는 달리 일반 공모사업은 열려 있는 사업으로 대상자 자격이 그리 까다롭지 않은 편이다. 농림축산식품부 같은 중앙 행정기관에서 지방자치단체, 농업·농촌관련 재단,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분야별로 공모를 진행한다. 내용도 단순히 아이디어 제안에서 시범사업처럼 농가, 기관, 단체, 마을에서 직접 운영하게 하는 등 매우 다양하다.
지역내 사업전시회. |
우리 지역에는 가히 공모사업 유치의 귀재들이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기획과 아이디어로 지원사업을 끌어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간 많게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받아 마을과 지역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수억원의 사업은 귀농인들이 지역민과의 공조로 유치하고 그보다 적을 때는 독자적으로 기획한다. 덕분에 지역민들도 수혜를 입어 귀농·귀촌인들과의 거리도 더욱 가까워졌다.
각종 지원사업들은 전과는 달리 대상자 선정할 때 사업을 받아서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이들을 간절히 찾고 있다. 예전에는 선정 과정에서 아이디어나 기획의 품질보다 인맥이나 행정과의 끈이 어느 정도 작동했다면 지금은 한층 투명해지고 심사가 엄격해졌다. 우리 귀농·귀촌인들에게는 자립뿐 아니라 마을과 지역에 봉사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부디 후배님들이 각자의 삶터에서 작가적 관찰력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마을과 지역, 나아가 농업·농촌에 푸른 희망을 더하는 활력소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 지역에는 분명 마을활력소가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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