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이 바뀌면 삽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김영삼에 반기를 들었던 ‘철강왕’ 박태준은 김영삼 집권 뒤 3년6개월간 외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김대중정부 시절 2002년 대선 때 ‘20만달러 수수설’을 흘리며 이회창 후보 공격에 앞장섰던 청와대 정무비서관 A씨는 15년째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방통대군’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양아들’로 불린 정용욱 전 방통위 정책보좌관은 친이명박계 국회의원들에게 돈봉투를 전달한 혐의 등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뒤 해외로 출국해 지금까지 종적이 묘연하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해외도피사범이 249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도피사범 명단에 조만간 한 명이 추가될 분위기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사를 맡았던 이인규 전 대검 중앙수사부장이 미국으로 출국한 뒤 들어올 기미가 없다. ‘논두렁 시계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그는 국정원 적폐청산 TF의 활동이 시작될 무렵인 지난 8월 해외로 나갔다. 서울 평창동 집은 텅 비어 있다. 최고의 칼잡이 출신이 칼의 속성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김종필 회고록에 따르면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났던 ‘풍운아’ 김종필에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고난을 다 겪고 나면 나중에 기가 막힌 향기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라고 위로했다. ‘아름다운 매화도 엄동설한 속에서 고초를 겪은 뒤에야 비로소 그윽이 향기를 사방에 풍긴다’는 뜻의 시경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씨가 그런 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직 대검중수부장의 처신은 아니다.
김기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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