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위험으로부터 항구와 어촌지역을 보호해 주는 방파제에 쓰이는 테트라포드(일명 삼발이)가 현대미술이 됐다. 회색의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원색의 풍선구조물이 되어 바다 위에 둥실 떠 있기도 하고, 백사장에 덩그러니 놓이기도 한다. 모양은 테트라포드이지만 생경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포항지역 바닷가에도 테트라포드 조형물이 등장했다. 포항문화재단(이사장 이강덕)이 작가와 손잡고 11·15지진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시민들에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마련한 조형물이다. 작품 제목은 ‘방파제’로 붙여졌다. 30여년간 한글조형화 작업을 해온 금보성(53) 작가의 작품이다. 내년 1월2일까지 영일대해수욕장 등에서 볼 수 있다. 크기가 6m가 되는 규모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에 설치된 자신의 작품 ‘방파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금보성 작가. 그는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방파제 테트라포드를 한글조형물로 낯설게 해 생명안전을 환시시켜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
그의 작품은 생명, 안전, 평화에 무감각해진 세상에 대한 환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친숙한 사물에 주목하지 않아요. 무의식중에 흘러가는 사물이 되지요. 하이데거는 죽은 사물을 되돌릴 수 있는 게 예술작품이라 했습니다. 예술은 사물의 참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망각된 존재를 일깨우지요.”
세상은 평화를 외치지만 현실은 ‘죽어가는 평화’가 아니냐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제가 안전을 위해 마련된 방파제를 엉뚱한 모습으로 또 다른 장소에 가져다놓은 이유죠.”
한글로 구성한 ‘자화상’ |
그의 작품 근저에는 한글이 흐르고 있다. 한글은 상형문자인 한자와 달리 표음문자라 추상성이 강하다. “모음과 자음의 조합, 색채까지 가세하면 다양한 평면과 입체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정 형상에 갇히지 않아 조형성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지요. 한글은 현대미술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글 글꼴의 형상은 수직, 수평, 원형, 사각 등 기하학적 추상과도 잘 어우러진다. 한글의 기하학적인 선이 건축적 구조와 만나면 현대적 입체물이 된다. 구체적 형상과도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한글의 구조다.
“평면, 입체, 추상과 구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다양한 조형적 변주가 가능하지요. 한글의 조형적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지요.”
그는 우리만의 언어인 한글은 한국인의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도구라고 했다. 시선의 높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조형물 ‘약속’ |
그는 원래 신학도였다. 해외 문화선교에 나서면서 한글의 조형성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어느 날 문뜩 깨우쳤다고나 할까요. 미친 듯이 한글조형작업에 매달렸습니다. 요즘에야 건축물 등에서도 활용될 정도지만 예전엔 한글조형을 실험하는 몇 작가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온전히 한글조형작업에만 천착했다. 하지만 세상은 미술전공을 안 했다는 이유로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작업을 위해 홈패션 디자인 사업 등을 하면서 버텨온 세월이었지요.”
그는 얼마 전 프랑스의 한 화랑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전속작가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알리고 자랑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무엇보다 우선 제가 인정을 받게 됐다는 점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누구나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는 것이 힘든 법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여전히 한국미술계는 그에게 따듯한 시선보다는 아웃사이더 취급을 하고 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도깨비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전시기회를 갖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갤러리 하나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업실로도 병행해 사용했지요.”
그는 몇해 전 아예 평창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금보성아트센터를 개관했다. 기회에 목마른 작가들에게 무료로 전시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1억 작가상’도 운영하고 있다. 전시기획 등을 아웃소싱으로 해결하면서 작업의 끈도 놓지 않고 있다.
“한국미술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 작업도 풍성하게 하는 길이지요. 수많은 아웃사이더들만이 한국미술의 건강한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예술은 원래 아웃사이더의 길이라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그가 한글조형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저는 미국의 팝아트 작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64년 작품 ‘LOVE’를 벤치마킹했습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단어 조각 하나는 뉴욕의 상징물로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미술 교과서에도 실리는 명작이 됐지요. 우리 한글도 다양한 측면에서 잘 활용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글조형작업이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지요.”
그는 이번 방파제 작업을 평창동계올림픽 장소에도 설치를 모색하고 있다. 세계인들에게 안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다.
“기회가 된다면 북한에 들어가 설치를 하고 싶습니다. 한글조형물이 평화 소통의 코드가 돼 희망의 노래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의 풍선 방파제의 낯섦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적대적 감정, 불편함 등을 정면으로 마주했던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낯설고 깜짝 놀라는 순간에 생명 평화의 깨침이 시작되게 마련입니다.”
그의 한글조형작업의 끝은 어딜까. 작업실로 총총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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