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최저임금 심의가 노사 양측의 극단적 주장으로 처음부터 과열 양상을 빚고 있다.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와 영세 소상공인의 임금 지급 능력 등에 관한 합리적인 논의보다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주장으로 비생산적인 논의를 계속함으로써 현행 최저임금 결정체계의 신뢰도만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지난 3일 오후 5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제8차 전원회의를 열어 내년도 최저임금 수준 심의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자정이 되자 최저임금위는 그 자리에서 제9차 전원회의를 열어 논의를 이어갔으나 4일 새벽 2시쯤 결론 없이 종료했다. 9시간 동안 평행선만 달린 것이다.
◆현실성 떨어지는 주장…비생산적인 논의만 지속
사용자위원들은 제8차 전원회의에서 내년도 최저임금의 최초 요구안으로 올해(8350원)보다 4.2% 삭감한 8000원을 제시해 근로자위원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국내에서 최저임금제도를 처음 시행한 1988년 이후 경영계가 삭감안을 제시한 것은 2010년 적용 최저임금 심의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 경영계는 5.8% 삭감을 요구했다.
노동계는 최저임금 삭감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근로자위원들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사용자위원들이 제시한 삭감안은 최저임금제도 자체를 부정하고 저소득, 비정규 노동자들을 우롱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저소득 노동자의 보호라는 최저임금의 제도적 가치와 헌법적 가치를 부정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내 최저임금제도 사상 최저임금을 삭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010년 적용 최저임금도 경영계의 삭감 요구에도 결국 2.75% 올랐다.
전문가들도 최저임금 삭감은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최저임금을 낮추면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최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이 깎이는데 이는 저임금 노동자 보호라는 최저임금제도의 취지 자체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삭감 현실성 '글쎄'
노동자의 생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면 임금 인상률이 최소한 물가 인상률보다는 높아야 하는 만큼, 최저임금의 삭감뿐 아니라 동결도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 악화를 초래한다.
최저임금을 삭감하면 실업급여와 취약계층을 위한 정부의 각종 지원금도 줄줄이 감액된다.
최저임금이 이들 지원금의 기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삭감으로 취약계층 전반의 생계가 악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잘 아는 사용자위원들이 최저임금의 삭감이라는 극단적인 요구안을 내놓은 것은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을 최대한 낮추기 위한 협상 전술로 볼 수 있다.
노동계를 자극해 근로자위원들의 '악수'(惡手)를 끌어내기 위한 전술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노동계 안팎에서는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가 노동계에 불리하게 진행될 경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근로자위원들이 집단 퇴장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근로자위원들만 남아 노동계가 수적으로 불리해진다.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에서 경영계의 강경한 입장은 소상공인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최저임금의 업종별 차등 적용에 강하게 반발하는 소상공인 대표 2명은 제8∼9차 전원회의에도 불참했다.
◆1만원 인상 역시 '무리수'라는 지적도 나와
내년도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려야 한다는 근로자위원들의 최초 요구안(19.8% 인상)도 현실성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2년 동안 급격했던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우세한 상황에서 20%에 가까운 전례 없는 인상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노사 양측이 합리적인 논의 대신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하는 힘겨루기를 계속함에 따라 현행 최저임금 결정체계에 대한 불신만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부는 최저임금위원회를 이원화해 전문가들이 최저임금 인상 구간을 정하면 노·사·공익위원이 그 안에서 금액을 정하도록 하는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을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다. 노동계는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이 최저임금 인상 속도 조절의 수순이 될 수 있다고 보며 반대하고 있다.
◆양측 1·2·3차 수정안 내놓으면 간극 좁혀갈 듯
이처럼 내년도 최저임금 협상을 둘러싼 노사의 본격적인 힘 겨루기가 진행되면서, 결국 캐스팅보트를 쥔 공익위원이 어느 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노사의 승패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일 오후 5시부터 지난 4일 새벽 2시까지 9시간 동안의 마라톤 협상에도 최저임금위원회의 노사 협상이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결국 박준식 위원장은 오는 9일 전원회의에서 수정안을 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날 전원회의는 마무리 됐다.
다만 박 위원장 요청대로 9일 노사가 수정안을 내놓을지는 불투명하다. 노사 양측은 수정안 제출 여부와 시기, 수준을 놓고 치열한 눈치싸움에 들어간 상태다. 현재로써는 양측 모두 최초요구안에서 한치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데드라인이라 할 수 있는 7월 중순이 가까워지면 공익위원들의 압박속에 1차, 2차, 3차 등의 수정안을 내놓으면 좁혀갈 것으로 예상된다.
공익위원들의 중재에도 노사 양측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으면 공익위원들은 노사 요구안을 토대로 '심의 촉진 구간'을 제시해 표결이나 합의를 유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공익위원들이 제시하는 심의촉진구간 안에서 결정된다는 점 때문에 공정성 시비가 생길 수 있다.
이에 따라 노사 양측이 직접 공익위원으로부터 표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수정안을 내도록 하고 표결을 하는 방식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지난 2017년 협상 때(2018년도 최저임금 결정) 이런 방법을 사용했었다.
당시 수차례 수정안을 통해 격차를 좁힌 노사는 최종안으로 노동계는 시급 7530원(16.4% 인상), 경영계는 시급 7300원(12.8% 인상)을 각각 제시해 표결에 들어갔다.
결국 27명이 표결에 나서 노동계 안은 15표, 경영계 안은 12표를 받아 노동계 안인 7530원이 2018년 최저임금으로 결정됐다.
지난해 협상 때(2019년 최저임금 결정)는 노동계가 끝까지 불참하면서 공익위원안 시급 8350원(10.9% 인상)과 노동자위원안 8680원(15.3%)이 표결에 부쳐졌다.
한국노총 추천 근로자위원 5명과 공익위원 9명 등 14명이 참석해 공익위원안 8표, 근로자위원안 6표로 공익위원안이 의결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첫 협상이라 할수 있는 지난 3~4일 전원회에서 어떤 결론이 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어느 정도 토론 과정을 거쳐 논의가 무르익어야 올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데 노사와 공익위원의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협상, 결국 공익위원 손에 달려 있어
그나마 지난 3~4일 전원회의에서 노사가 최초요구안으로 각각 1만원(노동계), 8000원(경영계)을 제시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최저임금 협상은 사실상 공익위원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현재 최저임금위원회 구조 때문이다. 최저임금위원회는 노·사·공익 각 9명씩 총 27명으로 구성된다. 노사가 마지막까지 대립하기 때문에 결국 공익위원이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릴 수 밖에 없다.
노사의 최초제시안은 사실상 상징적인 숫자에 불과하다. 이 숫자를 놓고 표결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기싸움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노사 최초요구안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숫자 안에 고도의 전략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경영계가 최저임금제도 취지에 벗어나는 삭감액(-4.2%)을 최초안으로 낸 것도 전략상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환경이 그만큼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노동계를 자극해 회의장을 나가게 만들려는 속내가 깔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지난 3일 전원회의 중 만난 한 근로자 위원은 협상이 잘 이뤄지지 않을 때 경영계 처럼 퇴장까지 염두에 두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왜 퇴장하느냐"라고 발끈하면서 "그게 사용자 측이 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정말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할 수 있는 카드"라고 여지를 남겼다.
사실상 이날 노사 협상이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채 9시간 넘게 설전을 벌인 것은 사실상 공익위원들을 설득해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강하다.
노사 협상이 본격화된 시점에선 노사 모두 공익위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억지를 부리는 듯한 모습은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용자 위원들이 지난달 26일부터 지난 2일까지 전원회의 '보이콧'을 하다가 납작 엎드린 시점도 박준식 위원장의 경고성 발언이 나온 시점부터다.
소통과 경청의 자세를 강조해온 박 위원장은 지난 2일 저녁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이익이 되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협상이 일종의) 제로섬 게임인데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다 뺏기는 것"이라고 사뭇 다른 어조의 강한 발언에 나서자 사용자 위원들은 다음날 곧바로 복귀했다.
지난 3일 한 사용자 위원들은 "오늘까지 안들어가면 더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크다"고 밝히기도 했다.
◆내년도 최저임금 고시 기한 8월5일…7월 중순까지 노사 치열한 공방 벌일 듯
노동계 역시 지난 2일 박 위원장에게 왜 '제도개선전문위원회' 설치를 합의도 없이 경영계 복귀 조건으로 내걸었느냐고 쏘아붙이다가도, 선을 넘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도 이런 이유가 깔려 있다.
이날 노사의 신경전이 거세지고 논쟁 시간이 길어지자 공익위원 간사인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가 노사 양측에 최초제시안을 어떤 근거와 생각을 갖고 제시했는지 듣고 싶다고 요청하자 고용지표, 주휴수당, 산입범위 등의 각종 지표와 쟁점 사안들을 가져다 노사 위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쟁이 불 붙는 양상을 보였다.
사용자 위원 측은 기본적으로 이미 현 최저임금이 기업의 지불능력을 초과했고 경제 상황, 취약업종의 일자리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점을 들면서 마이너스 인상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사용자 위원 측은 사업의 종류별 구분 적용(업종별 차등적용)이 이뤄지지 않은 점과 유급주휴시간 효과까지 감안하며 마이너스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노동자 위원들은 시급 1만원은 사회적 약속인데다, 최근 2년간 최저임금 인상으로 저임금계층 감소와 임금불평등이 개선되는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지난해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에 따른 실질임금인상의 삭감효과가 크다며 시급 1만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사는 이번달 중순까지 내년도 최저임금 수준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고용노동부 장관의 내년도 최저임금 고시 기한은 8월5일이다. 통상 이의신청 기간 등 행정절차 기간이 약 20일 정도 걸리는 점을 감안할 때 7월 중순까지만 결정해서 고용부에 넘기면 법적 효력이 인정된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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