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품 구입 확산에 일본여행 취소 행렬
불매운동이 온·오프라인으로 확산된 지난달 18일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는 ‘노노재팬’이라는 웹사이트가 등장했다. 이 사이트는 유니클로, 무인양품뿐 아니라 화장품 브랜드 우루오스, 보일러 생산업체 린나이 등 그동안 일제라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업체 정보와 국산 대체품 정보를 함께 제공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국산 제품이 대체제로 떠오르면서 반사이익을 얻는 업체들도 생기고 있다. 일본 수출규제 방침이 발표된 지난달 1일 이후 문구업체 모나미의 주가는 25일까지 74.7%나 올랐다. 유니클로의 경쟁 브랜드인 탑텐이 ‘1945’와 백범 김구 선생, 유관순 열사 사진을 활용한 ‘8·15 캠페인 티셔츠’를 출시하는 등 ‘애국 마케팅’도 활황이다.
불매운동 확산의 촉매제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의 혐한 파문이었다. 일본 의류업체 유니클로는 “한국내 불매운동이 오래 안 갈 것으로 본다”고 말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일본 화장품 전문회사 일본콜마의 합작회사인 한국콜마는 문재인 정부의 대일 대응을 비난하며 “아베는 문재인 면상을 주먹으로 치지 않은 것만 해도 너무 대단한 지도자”라고 억지주장하는 극보수 유튜브 영상을 틀어 논란이 됐다.
민간 차원에서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지목된 ‘일본여행 안 가기’에도 상당수 시민이 동참하고 있다. 한국여행업협회는 8∼9월 일본여행 상품 예약률이 전년 대비 59.5%로 줄었다고 밝혔다. 노랑풍선 관계자는 “7월 일본 상품 신규예약률이 30% 가까이 감소했고, 기존예약도 절반이 취소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주요 홈쇼핑들도 일본여행 상품 편성을 속속 취소하고 있다.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국내 저비용항공사들은 잇달아 일부 노선 운항을 중단했다. 교도통신은 “서일본에서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에서 유객(遊客·관광객)에 공들이는 지자체가 많아 지역경제 타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성숙한 국민운동 속에 일각선 찬반 갈등
일본여행 안 가기와 일본제품 불매운동은 대체적으로 성숙한 국민의식 속에 차분하게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를 놓고 찬반 대립이 벌어지며 갈등을 빚기도 한다.
리얼미터가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7일 발표한 불매운동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61.2%가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머지 33.8%는 불참하고 있다는 얘기다.
찬반 양측이 이같이 2대 1 정도로 나뉜 가운데 상대에 대한 비난이 과열 양상으로 흐르기도 한다. 특히 불매운동 반대파가 훨씬 극성스럽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대파에서는 유니클로 제품 구매 인증글을 올리며 불매운동 참여자를 조롱한다. 한 극우사이트에서는 “천황폐하 만세” 등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일부 불매운동 찬성파들도 불참자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유니클로 매장 사진을 몰래 찍어 인터넷에 올려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찬반 양측이 서로를 향해 ‘토착 왜구’ 혹은 ‘토착 빨갱이’라고 부르는 극단적 혐오 발언도 인터넷 공간에서 심심치 않게 눈에 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에선 조용히 불매운동을 참여하지 않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예정대로 올 여름휴가를 일본으로 다녀왔다는 직장인 이모(30)씨는 “괜히 표적이 되고 싶지 않아 주변에 알리거나 SNS에 사진을 올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반일 강요 집단주의·일본 혐오 경계해야
지난 6일 서울 중구청이 ‘노재팬’ 깃발을 걸었다가 시민들 반발에 역풍만 맞고 5시간여 만에 철회한 일은 불매운동의 방향성에 대해 시사점을 던졌다. 서양호 구청장은 당시 “중구청의 노재팬 배너기가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동일시해 일본 국민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와 불매운동을 국민의 자발적 영역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모든 일본인을 향해 반일감정을 조장하는 식의 감정적 대응, 관이 주도해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모양새 등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불매운동과 애국 마케팅을 강요하는 듯한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반감을 표시한다. 개인의 자유를 무시한 채 한 가지 행동양식만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가 과연 성숙한 시민의식인지 되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원생 손모(26)씨는 “소위 ‘매국노 색출 계정’은 너무 기괴하다. 일본 제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사람을 찾아내 공개하는 건 지나치다”고 말했다. 직장인 신모(24)씨는 “일명 ‘유니클로 순찰대’나 일본여행객 비난까지 간 것은 비이성적”이라며 “어느 학교에선가 플래카드를 걸고 (불매운동) 퍼포먼스를 했다는데 흡사 전체주의 사회를 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시민들에게 참여에 대한 압박감을 주고, 불매운동 자체가 비이성적인 차별의 구실이 되어 개인에게 위협을 준다면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되돌아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도 “민족정신에 기반했다 해도 남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불편을 주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며 “조급한 반일운동보다는 이성적이고 차근한 대응이어야 실책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IMF 때 금 모으기 351만명 참여… 유례 없는 일
우리 국민은 그동안 국가 위기나 외국과의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자발적인 단체행동을 통해 애국심을 표출해왔다.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 국민적 운동으로 확산하며 국란을 극복하는 사례가 많았다. 다만 일부 운동은 국민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민적 운동의 대표 사례는 ‘금 모으기 운동’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요청 당시 국가 부채를 갚기 위해 온 국민이 장롱에 보관하던 금을 내놓은 것이다. 351만여명의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해 21억3000만달러에 상당하는 227t의 금을 모았다. 당시 한국의 외환 부채는 약 304억달러에 달했다.
금 모으기 운동은 1998년 1월5일 시작돼 3월14일 공식 종료됐다. 이 운동은 국가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국민이 스스로 참여한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일로 꼽힌다.
한·미 쇠고기 수입 협상이 타결된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저지하려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한 방송사가 ‘주저앉은 소(다우너)’를 도축하는 장면 등을 방영한 것을 계기로 미국산 쇠고기가 함유된 제품과 이를 생산하는 업체들에 대한 불매운동이 본격화됐다. 정부가 국민의 먹거리 안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펴려다 역풍을 맞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추가 협상 과정에서 광우병이 발생할 시 수입 중단 조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다만 쇠고기 불매운동을 촉발한 연구자료의 일부가 과장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렀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2016년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는 중국의 한국제품 불매운동을 촉발했다. 중국이 롯데 제품을 불매하고 한국 단체관광을 금지해 16조원 이상의 피해액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일부 우리 국민도 중국제품 불매운동을 하자며 중국 맥주를 사지 않고 계획된 중국 여행을 취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드 배치를 놓고 정치권의 입장이 엇갈린 데다 국내 여론도 찬반으로 갈리면서 효과적인 불매운동이 되지는 못했다는 지적이다.
정지혜·김청윤·이종민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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