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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 가득 담긴 ‘느림의 美學’… “우리네 삶도 이랬으면…”

입력 : 2020-02-12 05:00:00 수정 : 2020-02-11 20:3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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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두 작가 개인전 / 가끔씩 속도 줄이거나 멈춰서야 / 지나칠 뻔한 풍경 발견할 수 있어 / 바삐 돌아가는 일상도 마찬가지 / 이따금 쉬어가는 과정 거친다면 / 잃어버린 날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비 오는 어느 여름날, 꽉 막힌 서울 시내 고가도로 위를 운전하다 문득 깨달았다. ‘천천히’(SLOW)라고 적힌 도로표지판 너머로 낯선 풍경이 두 눈에 쏟아졌다. 쉴 새 없이 직진만 하느라 그동안 눈을 두지 못했던 곳엔 어스름이 내린 북한산 풍경이 한 편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아, 속도를 줄이면 인간다운 삶이 되는구나.’ 김선두(62) 작가는 이날의 경험을 화폭에 담았다. 굽이굽이 펼쳐진 풍경의 한쪽에 동그랗게 자리한 반사경에는 초록 들판 사이로 난 한적한 2차선 도로와 전봇대,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새로운 각도와 반경의 세계다. 삶에도 이러한 순간이 필요하다. 가끔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서야 지나칠 뻔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직진을 방해하는 신호를 만나야 쉬어갈 수 있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에서 전시 중인 ‘느린 풍경 - 덕도길’이다. 지난달 22일 개막한 작가의 개인전 ‘김선두’에는 이 작품을 비롯해 느림의 미학을 느낄 만한 작품 19점도 함께 걸렸다. 그는 “젊은 시절 유명 화가가 되겠다고 바쁘게 속도를 내며 살다 보니 나도 주위 사람들도 피폐해졌다”며 “내 삶의 속도도 줄이면 더 인간적이고 여유 있는 삶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선두는 자신의 색을 한국의 묵은지와 고추장에 비유한다. 맵지만 겉절이처럼 화끈거리지 않는 빛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도 두껍게 중첩한 배경의 붉은빛과 달리 매우 옅은 농담으로 그렸다. 수채화처럼 가볍게 표현해 배경과의 대비를 극대화했다. 그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조화도 함께 이루고자 했다”며 “서양의 원근법을 담은 반사경 안 풍경,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동양철학이 나타난 이동시점의 빨갛고 따뜻한 배경을 그렸다”고 덧붙였다.

김선두는 다양한 실험적 시도로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온 대표적인 동시대 한국화가다. 작가의 작업방식에서도 느림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김선두는 바탕 작업 없이 수십 번의 붓질로 색을 쌓아 완성하는 ‘장지화’로 일본, 중국의 채색화와 구별되는 독자적 화풍을 발전시켰다. 장지 위에 분채를 수십 차례 반복해 쌓으며 깊은 색을 이끌어 낸다. 촘촘하고 튼튼한 장지가 물감을 깊이 머금어 발색이 곱고 그윽하다.

‘느린 풍경-덕도길’(2019). 차를 운전하다 굽은 길을 만나면 속도를 줄이고 반사경을 살피게 된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순간이다. 비로소 주위에 느린 풍경이 펼쳐진다. 학고재 제공

작가는 “이번 전시로 현대회화로서 한국화가 가능한지 보고자 했다”며 “묵유오채(墨有五彩: 먹에 다섯 가지 색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먹에 담긴 색을 잘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젊을 때는 빨리 그리는 것이 필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작품에 맞는 붓질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장지에 먹, 분채로 그린 ‘포구는 반달’ ‘마른 도미’ ‘철조망 블루스’ ‘행 - 아름다운 시절’과 같은 신작을 볼 수 있다. 능란한 붓질로 먹의 농담을 조절해 표현한 선들이 돋보인다.

그러나 전시에서 주목할 것은 이 같은 장르적 기법보다 그림에 담고자 한 김선두의 철학이다. “삶에도 이러한 순간이 필요하겠죠. 가끔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 서야 지나칠 뻔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직진을 방해하는 신호를 만나야 쉬어갈 수 있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나에게로 U턴하다’(2019). 작가는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어 멈춰 섰을 때만 유턴의 기회가 생긴다며, ‘나에게로 U턴’을 나의 본성으로 돌아갈 기회라고 해석한다. 학고재 제공

빨간불이 들어온 신호등과 유턴 표지판을 그린 ‘나에게로 U턴하다’도 직진만 하던 삶을 돌아보고 잃어버린 나에게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별을 만들어드립니다 - 호박’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이 작품은 도로 주변 시든 옥수수밭에서 영감을 얻었다. 시든 호박 줄기와 버려진 쓰레기와 화면 위 촘촘히 빛나는 별의 대비가 두드러져 생명과 죽음의 이미지를 한 화면에 포용하는 듯하다. 별은 언제나 하늘에 떠 있지만, 환경에 따라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욕망과 잡념을 버린 풍경 위 하늘 위에 비로소 삶의 본질인 별이 가득하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탐진치(貪瞋癡)를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번뇌를 떨쳐야 한다고요. 별은 언제나 하늘에 있는데 그게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해요.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잖아요. 삶의 중요한 것들이 그런 것 같아요. 탐욕과 집착을 좀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게 보이죠. 제가 별을 그리면서 하는 생각입니다.”

중앙대 미술학부 교수인 작가는 김훈 ‘남한산성’ 표지와 임권택 감독 영화 ‘취화선’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장승업 그림 대역을 맡았다. 지난해에는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학고재에서는 네 번째 개인전이다. 전시는 다음달 1일까지.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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