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바뀌어야 한다.’
21일 세계일보와 공공의창이 수행한 국민 인식조사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10명 중 9명이 ‘심각하다’고 여기는 등 디지털 아동성착취 범죄에 대한 국민들 우려는 생각보다 컸다. 최근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개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분야 전문가들은 “묘한 기시감이 들어 불안하다”고 토로한다. 과거 굵직굵직한 아동성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때마다 “다 뜯어고치자”는 여론이 불같이 일어났으나 결과적으로론 변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들’은 이름만 바꾼 채 나고 사라지길 반복해 왔다. 이에 취재팀은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우리 법원의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성인지감수성 확대, 기존 관행을 깨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답변이 공통적으로 돌아왔다.
◆“양형기준 신설은 기본 중 기본”
전문가들의 눈은 오는 6∼7월쯤 공개가 예정된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으로 쏠렸다. 아무래도 양형기준이 가장 피부에 와닿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김영미 법무법인 ‘숭인’ 변호사: “지금은 양형기준이 따로 없다보니 판사들이 서로서로 판결을 참고해 전반적으로 ‘하향평준화’된 판결만 나오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 사안에 대한 심각성이 없었다는 거다. 배포와 소지에 대한 처벌도 제작 못지않게 강화돼야 한다. 법정형 자체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자백이나 초범 등 기존 감경요소를 최소화해 실형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적어도 지금의 중구난방 선고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
다만 양형기준이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점에서 우려의 시각도 있다.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양형기준 강화로 기대감이 크다. 하지만 보수적인 우리 법원이 다른 강력범죄, 가령 살인 범죄에서도 동종 전과나 자백 여부를 따지는데 디지털성범죄만 예외를 두는 결정을 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아동성착취가 지닌 가해의 잔혹성과 피해의 참혹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법원에 큰 기대를 걸긴 어려워 보인다.”
◆“판사들 시각부터 바뀌어야”
세계일보의 ‘웰컴 투 비디오(W2V)’ 한·미 판결문 비교에서 드러난 건 우리 사법부의 ‘눈’이었다. 거칠게 말해 “그래도 강간보단 못한 것 아니냐”는 거다. 미국은 달랐다. 제작은 물론 배포와 소지가 일어날 때마다 피해 아동에게 새로이 성폭행이 가해지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 국민들의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디지털성범죄와 물리적성범죄에 관해 ‘서던 포스트’가 수행한 설문조사에서 국민 83.7%가 ‘둘 다 동일하게 나쁘다’고 보았고 7.3%는 디지털성범죄가 더 나쁘다고 보았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 “디지털성범죄는 강간과 패러다임이 다르다고 본다. 동등선상에 둘 수 없다는 얘기다. 자신의 영상물이 인터넷을 통해 무한정 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확장성이 있다. 그런데도 현재 소지자는 대부분 벌금형이나 집행유예에 그치고 있다. 범죄자들에게 ‘걸리면 인생이 바뀐다’는 인식을 심는 형벌의 일반예방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셈이다. 판사들의 이 범죄 특성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지금처럼 온·오프라인으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아동성착취’라는 큰 틀에서 관련 정책들을 이끌어 갈 전담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 “이제 온라인, 오프라인 아동성범죄를 서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 영향을 미치며 잔인한 범죄가 이뤄진다. 일단 정부와 중장년층이 디지털범죄의 구조부터 이해해야 한다. 모든 문제를 한 덩어리로 보고 현재 기능별로 분산돼 있는 역량을 한데 모으는 국가적 차원의 전담기구가 반드시 신설돼야 한다. 지금은 ‘아동성착취’의 정의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다. 디지털 세상의 특성과 범죄 양상을 보다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연구, 대응할 때다.”
◆“‘가보지 않은 길’ 가봐야”
피해 아동들이 받는 피해와 고통의 크기는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다. 피의자들의 기본권을 일부 제약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범죄를 제어할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한균 연구위원: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차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미국처럼 일상 전반을 규제하는 보호관찰제도를 참고할 만하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들어야’ 한다. 정부와 법원이 국민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예컨대 지금 법원의 양형기준 신설만 봐도 여지껏 공개심포지엄이 딱 1번 있었다.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도 없었다. 이래서는 실질적인 대응책이 나오기 어렵다.”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 아동인권 선진국들이 도입한 각종 수사기법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꾸준하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7.7%가 찬성한 ‘위장(함정)수사’도 충분히 고려해볼 만하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 “최근 아동성범죄의 특징은 우발적 범행이 드물다는 점이다. 미리 증거를 만들어놓거나 범행 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놓아 잡기도 어렵고, 잡아도 처벌이 어렵다. 여러 국가들이 도입한 위장수사가 매우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각종 반대 논리에 막혔지만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번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무엇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금도 많이 늦었다.”
특별취재팀=김선영·이창수·박지원 기자, 박혜원 인턴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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