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리얼리즘 정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해온 이상국 시인이 자전적 내용과 전통적 서정을 담은 신작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창비)을 상재했다. 정갈한 언어로 부드러운 서정을 그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후 5년 만의 여덟 번째 시집이다.
1976년 등단한 시력(詩歷) 46년의 이 시인은 우선 삶의 근원을 되새기는 시적 성찰과 불교적 사유가 웅숭깊은 자전적 시편을 다수 담았다. 어느 가을 밤 논의 물꼬에 쭈그리고 앉아 논물을 바라보던 아버지, 그 모습은 무심해서 오히려 더 그립다.
“벼가 패면 가을이 오고/ 가을에는 가난한 아버지가 온다// 논밭이 없는 사람들도/ 가을이 오는 걸 뭐라 하지는 않는다.// 가을은 사심이 없다// 공터에 버려진 거울에도/ 하늘이 얼굴을 비춰보듯/ 가을이 오면// 물꼬에 쭈그리고 앉아 밤을 새우던 아버지도/ 조용히 논물에 얼굴을 비춰보았다.”(‘논물’ 전문)
마냥 내면의 기억이나 자연친화적인 세계에만 머무는 건 아니다. “비부들이 판을 치”(‘동갑의 노래’)는 살풍경을 꼬집고, 제 잇속만 챙기는 “장사꾼들 세상”(‘복날 생각 혹은 다리 밑’)을 조롱한다. 산업재해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우리 현실을 규탄하는 다음 대목은 또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의 사용자에게 부과하는 벌금이 평균 450만원이라고 한다. 영국은 최소액이 약 8억 원으로 한국 노동자 177명이 죽어야 나오는 액수이다. 2010년 미 연방교통국이 산정한 시민 1명의 가치는 약 610만 달러라고 한다.//우리나라에서는 매일 일곱 명 정도가 산업재해로 죽는다고 한다./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불타 죽고 끼여 죽고 치여 죽고 부딪혀 죽고 터져 죽는다고 한다.”(‘…라고 한다’ 전문)
시인 안도현은 추천사에서 “그의 화폭을 들여다보면 기승전결이 단정한 선비의 한시를 읽는 것 같다”며 “때로는 간결한 정신주의자의 면모가 엿보인다”고 평했다.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이상국은 1976년 ‘심상’에 시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동해별곡’ ‘내일로 가는 소’ 등이 있다. 백석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재삼문학상 등을 받았다.
김용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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