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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이 쌓인 향긋한 커피가루, 한편의 풍경화가 되다

입력 : 2021-06-10 19:33:54 수정 : 2021-06-10 19: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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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원 개인전 ‘평행한 두 세계’

주로 빛·그림자 이용 ‘반사 시리즈’ 선봬
작품 ‘대한제국의 꿈’ 커피가루 활용 눈길
벽면 목재 패널에 가루 얹어 석조전 그려내
홍화·홍차잎으로 그린 드로잉作 흥미로워

빛 반사·그림자 활용 자기만의 세계 구축
자연의 신비 표현 ‘기여화광’도 놓쳐선 안돼
흔해빠진 광고 전단 비추는 평범한 조명
산의 실루엣 뒤로 변화하는 하늘빛 일품
‘대한제국의 꿈’ 성곡미술관 제공

커피가루가 향긋하다. 후각이 먼저 감각하고 나면, 가로 8m, 세로 4m 거대한 벽면에 짙은 갈색으로만 그려진 덕수궁 석조전 풍경이 시선에 들어온다. 커피를 즐겼다는 고종 황제의 시대 안으로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이 풍경화는 은은하게 관람객을 감싼다. 빨려 들어가듯 풍경화 앞으로 다가간 관람객은 그제야 향긋한 커피향의 비밀을 알게 된다. 벽면에는 수평으로 길게 흰색 목재 패널이 층층이 설치돼 있고, 선반처럼 설치된 그 층마다 커피가루가 쌓여 있었던 것. 층마다 다르게 쌓여 있는 고운 커피가루와, 커피가루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져 한편의 풍경화가 됐다.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리플렉션’(Reflection·반사, 반영) 시리즈를 선보여온 이창원 작가의 작품 ‘대한제국의 꿈’이다.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에 위치한 성곡미술관에서 이 작가의 개인전 ‘평행한 두 세계’가 한창이다. 리플렉션 이미지 시리즈 작업을 해 온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작까지 아우르는 이 작가의 중간회고전이다. 입체, 설치, 드로잉 등 약 250점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후각이 강렬한 첫인상을, 작품에 다가갈수록 놀라움을 주는 ‘대한제국의 꿈’은 작가가 어떻게 작업한 것일까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작가는 벽에 패널을 설치하고 덕수궁 석조전 풍경을 빔 프로젝트로 쏜 뒤에, 그 형태를 패널에 스케치했다. 스케치를 따라 곱게 분쇄된 커피가루를 조금씩 얹어나갔다. 실내조명 빛에 커피가루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생긴다.

대한제국 말기에 착공해 일제강점기를 버텨내며 단단한 역사적 시간이 녹아 있는 덕수궁 석조전 풍경이 이렇게 연약하고 가벼운 커피가루의 실루엣으로 완성된다. 작가의 노동이 녹아있는 이 작품은 설치된 현장에서, 설치 기간에만 만날 수 있다. 다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다시 패널을 설치하고 커피가루를 조금씩 얹어나가야 한다. 다음 설치 때에는 커피가루가 놓였던 자리에 찻잎이 놓일지도 모른다.

찻잎 드로잉 ‘바위산 인상’

작가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독일 유학 시절, 한국과는 크게 다른 식료품들을 흥미롭게 보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커피가루와 찻잎을 이용해 다양한 화면을 만들어낸 계기다. 그는 “말린 찻잎이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을 응축하고 있다. 그걸 우리는 따뜻한 물에 우려내 차로 마신다. 이 사실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선반 같은 구조물 위에 한 줄, 한 줄 찻잎을 얹고 선반 사이에 나타나는 반사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는 실론티라고도 불리는 홍화잎, 블랙티인 홍차잎으로 그린 드로잉과 크고 작은 입체 작품들 하나하나가 흥미롭다.

빛의 반사, 그림자를 이용하며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그림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빛의 반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원래 물체가 반드시 존재한다. 원본의 세계와 그림자의 세계는 그에게 현실과 반영, 근원과 표면으로 대칭을 이루고 그는 자신의 이런 작품들을 ‘평행한 두 세계’라고 이름 붙였다.

가령 작품 ‘두 도시’는 서울 풍경, 평양 풍경 사진을 두고 조명을 비춰 두 도시가 이어져 보이도록 만든 작품이다. 현실에서는 분단된 두 도시가 ‘리플렉션’의 결과물, 혹은 환영 속에서는 마치 하나의 도시처럼 절묘하게 이어져 나타난다.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 현실과 이상 등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기여화광’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 중 ‘기여화광’(氣如火光)은 놓쳐선 안 될 작품이다. 한국 특유의 완만한 산등성이 위로 노란 빛이 푸른 빛으로, 푸른 빛이 다시 붉은 빛으로 변한다. 마치 해가 뜨고 지는 하루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서광이 비치고 노을이 지는 하늘처럼 변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작품에 다가가 산등성이 형태로 만들어진 나무패널 뒤를 살짝 보면 턴테이블 위로 일상에서 흔해 빠진 광고전단이 놓여 있고, 이 전단을 평범한 조명이 비추고 있다. 벽을 밝히는 매혹적인 빛은 광고전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는 조선왕조실록에 ‘기여화광’이 200여번이나 기록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기여화광은 하늘에 붉은 기운이 만연한 신비로운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이처럼 기이한 현상이 곧 천재지변이나 성난 백성의 민심을 대신한다고 생각했다. 자연 현상을 인간사회와 연결해 해석하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한다. 산의 실루엣은 실제로 서울을 둘러싼 관악산, 인왕산, 북한산의 형태를 딴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산의 실루엣 위로 변화하는 하늘빛과 매일 수도 없이 접하는 광고전단을 병치시켜 우리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이창원의 평행한 두 세계는 매혹적인 빛으로 시선을 끌고, 기발한 방식을 들여다보게 한 뒤, 그 빛의 근원을 마주하게 한다. 그는 “우리 시대는 보이는 표면은 화려한 데 비해, 이게 어떻게 작동되는지 그 내부는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 현상의 실제 구조가 보이게, 또 사람들이 그 현상의 근원을 알고 싶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8월8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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