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도 경제파탄 해법 없어
정국혼란 틈타 최대 채권국 中
소리없이 정치적 영향력 키워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과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스리랑카 국민들은 거리에 나와 있다. 생필품을 사기 위한 줄이 끝없이 이어지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바꾸기 위해 격렬한 시위도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24년 11월까지 잔여 임기를 채울 새 대통령으로 의회에서 7월20일 선출된 라닐 위크레마싱헤는 전임 라자팍사 정권을 포함하여 과거 여섯 차례 총리를 지낸 정치인으로, 국가 경제 파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분노한 스리랑카 국민들의 정권 반대 시위도, 생필품 구입을 위한 기나긴 줄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2009년 북부 지역 타밀반군과 26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찾은 스리랑카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전 세계에서 관광객을 불러 모았고, 10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421억달러(2009년)에서 890억달러(2018년)로 경제 규모를 두 배 넘게 키웠다.
그런데 지난 5월18일 스리랑카는 국가 부도를 선언했다.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2019년 부활절 테러에 이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이 덮치면서 관광산업 수익은 94%(2018년 44억달러→2021년 3억달러), 해외노동자 송금액은 24%(2016년 72억달러→2021년 55억달러) 급감하여 외화 창고는 비어가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식품과 연료값이 추가 상승하자 해외 지불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현재 스리랑카 외환보유액 19억달러로는 금년 말 만기가 도래하는 70억달러가 넘는 외채를 상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2200만 인구의 식량, 의약품, 연료 등 생필품 수입도 어렵다. 물가는 50% 넘게 치솟고 문을 닫는 학교와 기업 수는 지난 1년 동안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자 성난 스리랑카 시민들은 목숨을 건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지난 10년 동안 대통령, 총리, 주요 5개 부처 장관 등 정부 요직을 독점한 라자팍사 가문의 독주, 부패, 무능에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그나마 대표적인 수출산업이던 차(茶), 고무 등 농업을 완전한 유기농법으로 전환한다는 섣부른 발상으로 생산량 저하, 식품 수입 증가라는 부작용을 불러왔다.
그런데 스리랑카의 향후 운명을 가르는 데 중요한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스리랑카 외채의 10%, 비공식적으로는 20%까지 차지하고 있는 최대 채권국이다. 라자팍사의 고향인 함반토타 항구 등 인프라 건설에 120억달러 가까운 대출을 제공했는데, 2017년 스리랑카가 대출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항구 사용권을 넘겨받았다.
2009년 타밀족을 강경진압한 라자팍사 정부의 인권탄압과 독재에 서방 세계가 비난을 쏟아낼 때 중국은 내정불간섭을 외치며 접근하여 서방의 공백 속에 스리랑카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스리랑카에 정당성을 인정받는 정부가 들어서는 것은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과도 선을 그어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도양 한가운데 위치한 스리랑카는 인도양 진출의 관문으로서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각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스리랑카의 위기 국면에서 중국은 원인 제공자인 동시에 해결자로도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인도와 미국의 설득으로 스리랑카는 지난 4월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구제금융의 조건에 대한 이견으로 IMF와의 협상은 일시 중단되었다.
스리랑카는 다시 중국과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친중인 라자팍사 정부의 공백을 인도와 서방 세계의 연대가 메울 수 있을까? 양 진영 사이에서 흔들리던 스리랑카의 전략적 추가 어디로 향할지는 앞으로 인도양의 전략 환경에도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스리랑카와 비슷한 환경에 놓인 라오스, 캄보디아, 잠비아 등 중국의 ‘부채함정’(debt-trap)에 빠진 국가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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