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보기관이 우리 대통령실을 도청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대통령실이 어제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임을 명백히 밝힌다”고 밝혔다. 야당의 공세에 대해서는 “한·미 동맹을 흔드는 자해행위이자 국익 침해 행위”라고 비판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도 기자들과 만나 “오늘 아침 양국 국방장관이 통화를 했고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데 대해서 한·미의 평가가 일치한다”고 말했다. 미국 측에 어떤 입장을 전달할 계획이냐는 물음에 “할 게 없다”며 “왜냐하면 누군가가 위조를 한 것이니까”라고 답했다. 의혹이 불거진 지 단 이틀 만에 미국보다 먼저 우리 정부가 스스로 ‘거짓’ 판정을 내려 준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기밀 문건에는 한국 당국자들의 대화를 어떤 식으로든 도청하지 않으면 알아내기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유출 여부에 대해 짧은 시간 안에 충분한 조사가 이뤄졌는지 의문이다. 존 커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관도 10일(현지시간) “우리는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어 우리 정부가 너무 서둘러 진화하려 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달 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파문을 최소화하는 데 급급한 게 아닌지 묻고 싶다. 경위를 따져 물어도 시원찮은 마당에 우리가 먼저 미국 측에 면죄부를 줘서야 되겠는가.
애초부터 우리 정부는 “상황 파악이 끝나면, 필요할 경우 미국에 합당한 조치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히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2013년 10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도청이 폭로되었을 때 독일 정부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 휴대전화 도청 의혹이 불거지자 독일 주재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했고 메르켈 총리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항의전화를 했다. 굳건한 한·미 동맹과 도청은 별개의 사안이다. 도청이 사실로 확인되면 통상적인 관행이라고 유야무야 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야당도 지나친 정치 공세는 자제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실 이전 과정에서 도·감청 차단 설비 등을 부실하게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용산 이전을 끌어들이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용산 대통령실은 군사 시설로, 과거 청와대보다 강화된 도·감청 방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야당이 외교 문제를 국내 정치적 이득을 위해 정쟁화하면 외교 정책이 꼬이게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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