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또 ‘그 메일’을 받았다. 기자라면 한 번쯤 받는다는 ‘기사 작성 시 쉬운 우리말 사용 요청’ 이메일. 발송 주체는 국어문화원 연합회다. 이곳에선 국민 이해도가 40% 이하로 나온 ‘리스크’, ‘인프라’ 같은 단어를 ‘위험’, ‘기반 시설’ 등으로 고칠 것을 권장한다.
가장 최근 받은 요청에서는 기사 속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말한 ‘윈윈’이라는 표현을 ‘상생’으로 바꿔 쓰자고 했다. 직접 인용에서까지 단어를 임의로 바꾸는 게 적절하냐를 차치하고라도 어딘가 시원하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국어 사랑과 외국어 사용은 정말 배치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둘 다 포용하는 선택지는 없나. 외국어 표현을 이해 못 하는 이들을 위해 외국어를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외국어를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건 어떨까. 모든 표현을 한글화하려는 강박보다는 한글 뜻 괄호 병기나 설명 문장을 넣는 식으로 조율하는 것이다.
한국어 지키기의 핵심은 상황에 맞게 가장 적합한 한글 표현을 구사하는 데 있지 단어 단위로 기계적으로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한국어로 된 좋은 콘텐츠를 많이 남기고, 해외에 한글 사용자가 늘어나도록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각에선 문해력 위기를 말하며 우리말 쓰기를 강조하는데 이 또한 무리가 있다. 문해력 논란의 대표 사례인 ‘심심(甚深)하다’의 뜻을 모르는 젊은 세대는 한자를 모르는 것이지 우리말을 모르는 게 아니며, 문해력의 본질은 사실상 언어보다는 분위기 파악이나 사회성에 가까워서다.
외국어로 된 표현을 잘 모르는 국민이 많다는 점은 다른 의미로도 심각성을 내포한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그만큼 좁은 세상에 고립돼 있다는 뜻일 수 있다. 많은 한국인이 훌륭한 실력과 근면성실함을 갖추고도 국제무대로 나갈 엄두를 못 내는 건 영어 때문이 크다. 바꿔 말하면 언어 문제만 해결해도 무궁무진한 기회가 더해진다는 얘기다.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챗GPT 활용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영어 사용이 일상적이지 않은 탓이 크다고 한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AI) 기술은 국가의 경계도 없고, 나라 간 격차도 시시각각 벌어지는 중이다. 한번 뒤처지면 따라잡기 힘들 만큼 속도가 빠르다. 이런 기술의 기반은 이미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다져져 있기 때문에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도 오히려 영어 사용을 장려해야 할 판이다.
한때 주목받았던 ‘영어 공용화론’을 다시 진지하게 고민할 만하다고 느낀 건 그래서다. 아프리카에서 근무했던 한 정부 관계자는 한국 사회보다 글로벌 사우스(아프리카·중남미 등의 개발도상국 집합체) 국가들이 세계 시민의 개념에 더 부합하는 사고를 하는 것에 놀랐다고 평가했다. 이들 국가는 상당수가 영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하기에 그럴 것이란 분석이다.
물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지나친 영어단어 사용 등은 지양해야겠지만, 외래어 수준으로 정착됐거나 국제사회에 통용되는 관용어 등은 그대로 쓰는 편이 소통과 효율 면에서 낫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세계 속 한국의 역할 확대를 고민한다면 한 차원 높은 우리말 살리기와 외국어 포용 문화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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