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그리고 싶었던 작가, 회화 도구 삼아
그의 방식대로 대상과의 시공간 시각화
‘작업실’ 연작, 바라봄을 바라보는 시도
화면의 시선은 작가에서 관객으로 이동
◆투명한 공기의 부피를 감각하는 일
모호한 기억처럼 안개 덮인 장면들에 관하여 임노식(35)은 공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장소의 여백을 메운 대기를 감각하고자 몸을 저어 보고, 자세를 바꾸어 보고, 숨을 붙잡아도 보면서 말이다. 보이지 않는 물질의 분명한 존재를 의식하며 보통의 날들보다 기다랗게 대상을 응시하는 시간이 거듭되었다. 최근의 ‘작업실’ 연작은 유채 물감으로 묘사한 풍경을 다시금 오일 파스텔로 뭉개어 내는 방식을 통하여 대상과 자신 사이 시공간적 거리의 부피를 시각화한 결과물이다. 시각 매체인 회화를 도구 삼아, 보이는 것들의 형태를 누그러뜨림으로써 보이지 않는 무엇의 존재를 은유하는 그만의 방식으로서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에게 작업실이란 날마다 마주하는 일상적 공간인 동시에 자신을 자신이게끔 하는 모든 사물과 기억, 예컨대 화구와 물감들, 그리다 만 그림들과 그려야 할 공백들, 수많은 시간의 기록과 감정이 켜켜이 중첩된 입체적이고도 상징적인 장소이다. 스스로의 작업대를 바라보다 시선이 그곳에 닿기까지의 경로를 메운 투명한 입자들을 상상하고, 시시각각 흘러가는 시간을 촘촘히 숨쉬는 과정 가운데 형상의 윤곽은 수차례 덧쓰인 기억처럼 희뿌옇게 무디어진다. 마치 대상 위에 포개어지는 시선의 불가피한 진동처럼, 매순간 색채를 달리하는 정서의 어렴풋한 흔들림처럼.
임노식의 여섯 번째 개인전 ‘그림자가 머무는 곳’이 서울 연희동 소재의 스페이스 애프터(Space Æfter)에서 진행 중이다. 2024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마련된 이번 전시는 지난 21일 개막하여 9월13일까지 진행된다. 올해 제작한 다양한 규모의 ‘작업실’ 연작 총 57점이 선보인다.
작가는 198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5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한 후 2017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전문사를 취득했다. 금호미술관(2023),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2023), 인천아트플랫폼(2020), 아트스페이스 보안 2(2020), 합정지구(2017)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2024), 송은(2023), 일민미술관(2023), 아트센터 화이트블럭(2022), 아마도예술공간(2020) 등이 연 단체전에 참여했고 2022년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되어 주목 받았다.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13기(2019),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플랫폼 11기(2020),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 12기(2021)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OCI미술관, 일민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등의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회화의 눈으로 바라본 장면들
바라봄에서 출발하여 바라봄으로 귀결되는 회화의 과정 가운데 임노식은 물리적 신체로써 인지한 세계 안팎의 비가시적인 대상들을 목격하고자 시도한다. 복수의 화면에 등장하는 작가 자신의 형상은 때로 바라보는 주체이고, 때로 보이는 객체가 된다. 화면마다 파편처럼 담긴 자화상은 자기 신체의 영역을 벗어난 거울 속의 대상인 한편, 회화에 의하여 목격당한 역방향의 풍경으로서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 거리를 담보하는 안개에 뒤덮인다. 회화의 화면을 중심에 둔 시선의 주인은 작가였다가 대상을 거쳐 관객의 자리로 옮겨 온다.
일련의 작업실 풍경 속 몇몇 요소는 다양한 규모의 화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전시장 한쪽 벽면을 채운 ‘작업실 32∼83’(2024) 연작의 소형 화면 위에 자리 잡은 정물 및 신체의 조각들이 저마다의 간결한 단상이라면, 그 양옆 벽면에 각자 선 ‘작업실 85’(2024)와 ‘작업실 84’(2024)와 같이 작가 스스로의 몸보다 큰 대형 화면에서는 그러한 단상들을 마주하는 관점 및 거리 설정의 변주를 시도한다.
전자의 화면은 단편적 이미지들을 보다 확장된 장소 안에 위치시킨 원거리의 작업대 풍경을 보여주며, 후자의 작품은 두 팔을 그러모아 공기를 끌어안은 자화상을 확대경으로 비춘 듯 커다랗게 묘사함으로써 몸으로 하여금 광대한 풍경이 되도록 한다.
화면 규모의 변화에 따라 함축적 낱말은 서술된 문장으로 확장되고, 기다란 줄글은 다시 상징적 단어로 분배된다. 각각의 장면에 담긴 서사를 마주하는 작가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 또한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시각적 현상 너머의 무엇,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끔 만드는 일은 오래도록 회화의 의무이자 목표였다. 임노식의 회화는 자신의 바라봄 자체를 바라보는 시도를 통하여 장소를 메운 투명함의 존재, 곧 인지된 세계 너머의 진실에 관하여 질문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뭉툭하게 밀어냄으로써 보이지 않는 층위를 역설하는 방식을 통하여서다. 회화의 윤곽 내에 포착된 각각의 장면들이 저마다 다른 공기의 부피를 안고 안개 너머 지금의 이곳을 본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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