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번역 겸업하는 이유? …나와 맞는 재밌는 책, ‘함께 읽어줘’란 마음

입력 : 2025-02-04 21:21:49 수정 : 2025-02-04 21:21:48

인쇄 메일 url 공유 - +

최근 번역 ‘브로츠와프의 쥐들’
폴란드 공산정권 배경 좀비소설
작가 슈미트, 韓 좀비물 애청자
‘韓영화로 제작됐으면’ 바람 전해

내 작품 ‘저주토끼’ 번역한 안톤 허
소설가 데뷔작 국내 번역 도맡아
내 차기작도 내달까지 마감 목표
‘필립 K 딕상’ 후보된 것 이례적 일

정보라의 시대다. 그는 지난 한 해에만 두 권의 소설집, 그리고 단편소설, 에세이 한 권씩을 냈다. 과거 출간한 작품을 다듬어 내놓은 개정판과 공저한 소설집 등을 더하면 권종은 훌쩍 늘어난다. 독자가 따라 읽기도 버거울 정도의 생산성인데, 올해 들어서는 그가 발굴해 출간으로 연결시킨 장편소설 시리즈 번역서가 벌써 둘이나 나왔다.

 

최근 출간된 로베르트 J 슈미트의 ‘브로츠와프의 쥐들:카오스’(다산책방)는 좀비물을 포함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팬들에게는 선물 같은 책이다. 1962년 폴란드 서부 실롱스크 지역의 대도시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난 슈미트는 1980년대부터 활동해 슬라브어권에선 널리 알려진 SF 작가이지만, 2015년 출간한 이 책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올해 세계 3대 SF 문학상인 필립 K 딕상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폴란드의 좀비 아포칼립스 SF 걸작 ‘브로츠와프의 쥐들:카오스’ 번역서를 최근 출간했다. 작가 제공

소설은 1963년 출혈성 천연두가 대유행해 봉쇄된 폴란드 브로츠와프를 배경으로, 좀비가 출현한 첫 12시간 동안 격리병동과 간호학교, 군대 등 여러 집단에서 발생한 혼돈을 다룬다. 죽은 줄 알았던 시신들이 다시 몸을 움직여 인간을 찢어발기는 이 ‘변질’이 어떤 질병이며 어떻게 전염되는지, 이 질병을 뭐라 명명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끔찍한 증상과 좀비 사태는 확산된다. 

 

“변질자가 그들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라타이치크는 우르마노비치가 부대에서 가장 힘센 경관의 팔을 비튼 뒤에 마치 푹 삶은 닭에서 날개를 뜯어내듯 관절에서 팔을 뜯어내는 광경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 모든 경관의 혈관 속 피를 얼어붙게 한 이 모든 일이 고작 십여 초 만에 벌어졌고, 오직 마베트만이 이제 진짜 악몽의 전주곡이 시작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125∼126쪽)

 

도시에 위기가 닥쳤지만 지도자인 지역인민위원회 서기장은 내연녀와 함께 도망치기에 바쁘다. 공산당은 급기야 브로츠와프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라고 러시아에 부탁해 감염병을 불태워 없애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카오스’는 브로츠와프의 쥐들 3부작의 첫째 권이다. 750쪽 분량의 벽돌책이지만, 앉은자리에서 수월하게 백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솜씨는 슈미트와 정보라 모두의 것이다.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 작가가 브루노 슐츠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등 슬라브어권의 주목할 만한 작가들의 탁월한 번역가였다는 사실을 재차 상기하게 된다. 시리즈 둘째 권의 번역을 최근 마쳤다는 정 작가를 3일 전화로 만났다. 

 

—이 책을 번역한 이유는.

 

“1963년에 브로츠와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출혈성 천연두 감염 사태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공산주의 폴란드의 엄혹하고 긴장된 사회체제와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트라우마가 짙게 남아 있는 브로츠와프라는 배경이 이 작품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든다. 당시 폴란드는 군인과 경찰이 사회 주도권을 쥔 억압적인 사회였고, 소설에서 좀비 감염병 사태의 가장 전면에 나서는 사람들도 군경이다. 차량부대, 기갑부대 같은 무장 경찰도 나온다. 1960년대 공산 폴란드의 엄혹한 모습에서 같은 시기 군사독재 치하 한국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식민 지배를 겪고 그 직후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고 군사독재를 겪은 양국의 역사가 여러모로 유사하다. 유년기를 보낸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치하가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2022년 독자로서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때 그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 이 작품을 꼭 소개하고 싶었다. 실은 슈미트 작가가 영화 ‘부산행’과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한국 좀비물을 매우 좋아한다. 이 소설이 한국 좀비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희망도 전했다.(웃음) 실제 국내 좀비물이 다양한 공간과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는데, 군대나 경찰을 배경으로 한 경우는 없었다. 고립되거나 공동생활하는 환경이니까 좀비가 발생하기 좋은 조건인데 말이다. 이 소설에서 관료와 공산당 간부들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좀비 창궐이라는 비상상황을 목도하고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무조건 덮으려는 자세를 취한다. 번역은 12·3 비상계엄 사태 발생 이전에 했지만, 이후 널리 알려진 군의 실상을 보면 우리도 최전선 경계초소에서 좀비가 발생하면 (지휘부가) 덮으려고 할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소설과 현실이) 비슷하다. 비슷해서 불행하다.” 

 

—왜 번역하는가. 소설가의 겸업인가, 그 이상의 의미인가.

 

“독자로서의 열정이 넘친 결과다. 정말 재미있고 장점이 뚜렷한 책을 만나면 ‘나만 재미있어할 순 없어. 나와 함께 읽어줘’ 하는 심정이 된다. 사실 2022년 ‘저주토끼’가 부커상 국제부문 후보에 오른 이후 번역가로서의 자아가 많이 바뀌었다. 연세대 강사를 그만둔 시점이기도 하다. 그때까지는 학생들을 위한 수업자료로 쓰거나 논문에 활용하기 위해, 또 교원 학술업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서 번역했다. 그러다 더 이상 연구자가 아니게 됐고, 학술업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전엔 매끄럽거나 가독성 좋은 번역을 추구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각주를 우다다 붙이고 설명을 많이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해 부커상 국제부문 수상자인 작가 기탄잘리 슈리의 번역가 데이지 로크웰을 만났다. 각주를 붙이는 건 번역가로서 실패한 것이고, 독자가 추가자료를 찾지 않고 본문 내에서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 이 말이 영향을 미쳤다. 이전엔 연구자로서 번역했다면, 이후엔 독자로서 혹은 소설가로서 번역한다. 전환이다.”

 

—번역할 책을 고르는 방법이 있다면.

 

“정말 유명하고 엄청난 작가들의 책은 굳이 덤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훨씬 잘 하는 번역가들이 작업하고 계실 테니까. 나는 나와 같은 패널에서 독특한 이야기를 하는 작가들이 재미있다. 실은 2022년 그놈의 부커상 후보 선정 이후 난데없이 유명해져서 해외에 불려다니는 일이 종종 있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데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해외 작가들을 많이 뵙게 된다. 국제행사에 참여하면 번역하고 싶은 책을 한 권씩은 만난다. 문체가 나와 맞거나,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책들이다. 너무 복잡하거나 문체가 시적이라면 재미가 있어도 엄두를 못 내는데, 작가와 성향이 맞겠다 싶은 책들이 나타난다. 지난달 출간된 대릴 코 작가의 소설 ‘미스트 바운드’(올리)를 예로 들어볼까. 작가와 함께 한 국제행사 환상문학 패널로 참여했는데, 아주 재밌을 뿐 아니라 엄청나게 촘촘하고 성실하게 쓴 전형적인 모범생 같은 작품이란 게 대번에 티가 났다. 국내 어린이·청소년이 읽으면 좋겠지만, 청소년 문학을 쓰려는 사람들이 읽고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했다. 내가 번역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마감이 첩첩 쌓인 와중에도 지난해 11월 번역하고 싶은 책을 발견했다. ‘얼른 기획서 만들어야 하는데’ 하는 무거운 마음을 4개월째 품고 있다.(웃음)” 

 

—향후 출간 계획은.

 

“브루노 야센스키의 1929년 작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번역을 지난해 말 출판사에 넘겼다. 지난달 중순엔 나탈리야 쇼스타크의 소설 ‘상실’ 번역 초고를 넘겼다. 폴란드 신문사에 속한 현직 문화예술 전문기자인 저자의 소설 데뷔작인데 시어머니와 며느리, 손녀로 이어지는 여성 3대의 이야기다. 초점 여성들의 캐릭터 너무 좋다. 이달 초까지 번역의 풍랑은 지나갈 거고 다음달까지 제 소설을 열심히 마감할 것이다. 다음달부터 다시 시동을 걸어서 안톤 허의 소설 번역을 할 계획이다. 안톤은 2022년부터 ‘저주토끼’와 ‘너의 유토피아’ 등 내 소설을 번역해서 그야말로 빵빵 터트리고 있다. 안톤의 데뷔작 번역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19세기 영국 시 전공자이고, 이번 소설이 굉장히 아름다운데 기본적 정서가 시적이다. ‘큰일났다. 내가 이걸 왜 하겠다고 했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의 한국어 번역이 안톤의 영어 번역만큼 뛰어난가? 그것도 아니다. 예정된 패배다.(웃음)”

 

—4월 발표될 필립 K 딕상 수상 결과를 많은 이들이 주목한다. 

 

“경쟁주의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영어권 SF문학상이 몇 개나 있나 찾아봤더니 23개더라. ‘세계 3대 SF상 중 하나’라고 홍보됐는데, ‘세계 23대 문학상’이라고 말하면 멋있지 않으니까 십의 자리의 2를 지운 것 아닐까. 농담이지만, 필립 K 딕상은 1983년 제정됐는데 이전까지 번역작품이 후보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너의 유토피아’처럼 단편집이 후보에 오른 것도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요는, 안톤 허가 거대한 성취를 이룩했고,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극히 낮은 확률을 뚫은 것이며, 상을 바라는 건 무리라는 점이다. 같이 후보에 오른 분들을 보니 아주 쟁쟁하더라. 이들을 만나서 함께 대담할 생각을 하니 좋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아이브 장원영 '깜찍한 브이'
  • 아이브 장원영 '깜찍한 브이'
  • 아이브 안유진 '심쿵 미소'
  • 블랙핑크 지수 '여신이 따로 없네'
  • 김혜수 '눈부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