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이 지난해 기준으로 2년 만에 중국에 대부분 추월당했다는 전문가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특히 기초 역량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더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설문에 참여한 전문가 39명은 앞서 2022년 평가 때와 달리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고성능·저전력 인공지능(AI) 반도체, 전력 반도체, 차세대 고성능 센싱 기술 등 다수의 분야에서 역전을 허용했다고 진단했다. 미·중 기술패권 각축의 틈바구니에서 경쟁력을 점점 잃고 있는 우리 반도체산업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한국은 여전히 메모리반도체 강국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난해 3분기 D램 합산 세계 시장 점유율은 75.5%다. 낸드는 55.8%에 달한다. 그러나 기술경쟁에서 뒤진다면 시장을 내주는 일은 시간문제다. 메모리 시장에서 한국 기업에 밀려난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외신의 전망이 현실화될까 우려된다.
반도체 경쟁은 이미 기업을 넘어 국가대항전 양상이다. 중국의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와 푸젠진화(JHICC),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등은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 업체와의 점유율 격차를 줄여왔다. 반도체산업 회복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총력전을 벌여온 일본에선 키옥시아가 세계 최초로 332단까지 쌓아 올린 낸드 메모리를 선보여 우리 업체를 앞질렀다. 우리 반도체 주요 수입국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해 4월 이후 수입품에 25% 이상의 관세를 물릴 태세다. 이처럼 주요국이 사활을 걸고 무한경쟁에 돌입한 가운데 우리 처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발등의 불인 반도체특별법조차 무산될 위기이니 한심한 노릇이다. 여야가 정파적 이익을 앞세워 합의안조차 못 내놓는 실정이다. 특히 거대 야당은 특별법에 포함된 ‘연구·개발(R&D) 인력 주 52시간 근로 예외’를 두고 갈지자 행보를 보여온 만큼 책임이 적잖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세균 전 총리까지 참다못해 “민주당이 양보해야 한다”고 일갈하지 않았는가. 최근 류진 한국경제인협회장이 취임사에서 “반도체 생산라인의 증설 허가를 받는 데만 2~3년이 걸린다”고 지적한 대목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분초를 다투는 첨단산업에서 한번 격차가 벌어지면 따라잡기가 어렵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