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남 지자체의 A팀장을 만났다. 30년 이상 공직생활을 했지만 그는 공무원의 꽃인 사무관을 아직 달지 못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흔한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매주 한 차례 특정 요일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어서다. “이게 무슨 표시냐”고 물었다. A팀장은 낮은 목소리로 “상사님 모시는 날”이라고 했다. 그는 시아버지 제삿날은 잊어도 이날은 절대 까먹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기자가 관심을 보이자 주머니에서 손때가 묻은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 수첩에는 지자체 청사 인근의 식당은 물론 메뉴별 맛집이 쭉 적혀 있었다. 전·현직 국장과 과장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메뉴를 빼곡하게 적은 리스트도 보였다. 식사 후에 매긴 것으로 보이는 상·중·하 평가 점수도 있었다. 물려받은 수첩에 그가 내용을 추가한 ‘부서장 모시기’ 족보다. A팀장은 “옳고 그른 것은 잘 모르겠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걸로 국·과장이 언짢아하면 인사고과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다. 승진을 앞둔 그에겐 상사 모시기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업무로 보였다. 이런 현실이 무척 안타까웠지만 승진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그의 마음이 이해됐다.

하위직 공무원들이 국장과 과장 등 부서장의 점심 식사를 챙기는 이른바 ‘부서장 모시기’ 관행이 여전하다. 그동안 수차례 의회나 언론에서 지적해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부서장 모시기는 하나의 과(科) 아래 3∼4개 팀이 요일마다 순번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국·과장의 점심을 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하위직 공무원들이 사비를 모아 매주 한두 차례 국·과장에게 밥을 산다는 점에서 부조리한 공직문화다. 국·과장의 혼밥을 하위직 공무원이 식사 당번으로 해결하는 이런 방식은 우리 사회 어느 조직에도 없다.
이런 부서장 모시기의 병폐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과장을 모시는 일이라 식사장소와 메뉴는 상사의 입맛에 맞춰져 있다. 하위직은 자기 돈을 내면서도 억지 점심을 먹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처럼 음식값이 오른 데다 팀원이 적을 경우 식사비도 만만찮게 든다.
공직사회는 ‘나도 했으니 너도 해라’는 식으로 대를 이으면서 이 같은 악습을 관행으로 굳혀왔다. 그동안 전국 지자체 새올행정시스템(사내 게시판)에는 “밥이라도 마음대로 먹자” “9급이 매월 10만원 내는 게 장난 아니다” “국·과장끼리 밥 먹어라”라는 성토가 잇따라 올라왔다. MZ공무원 엑소더스에 부서장 모시기 같은 악습이 원인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최근 부서장 모시기로 논란이 된 광주 서구의 한 과장을 만났다. “꼭 하위직 공무원이 사주는 밥을 먹어야 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직원들끼리 다 나가면, 나 혼자 밥 먹어야 된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식사하면서 고충도 듣고 업무 소통의 공간이 되고 있다고 자평했다. 왜 부서장 모시기가 근절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직사회 스스로 이 문제를 풀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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