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재판관 판단 바꾸지 못해
‘어떤 결과든 승복’ 메시지만이
국가적 혼란·갈등 줄일 수 있어
“사람들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때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정치 성향과 의도, 인성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진실 따위는 사라져버리길 바라죠. 모든 게 끝나면 하도 시끄럽게 발을 구르고 고함을 쳐대서 뭐가 핵심이었는지는 다 잊어버리고요.”
영화 ‘트루스(Truth)’ 주인공인 CBS 시사고발 프로그램 ‘60분’ PD 메리 메이프스가 회사 감사팀에 한 말이다. 영화로 제작된 메리의 자서전에는 ‘부시는 군인의 의무를 다했느냐’는 질문은 사라지고 보수 성향 유튜버, 네티즌의 여론 재판으로 들끓은 과정이 담겼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메시지 진위를 따지기보다 메신저를 공격하는 일은 너무 쉽다. 좌, 우로 갈려 서로 죽일 듯 싸우는 상황에서는 ‘뭐가 중한지’ 길을 잃기 일쑤다.

대통령이 돌아왔다. 서울구치소와 한남동 관저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내친김에 여당 지도부는 탄핵을 각하하라며 대통령을 부정의의 희생양처럼 감싼다. 야당은 내란 발호 세력 운운하며 석방 지휘를 결정한 검찰총장을 탄핵하겠다고 한다. 광장의 목사 전광훈은 “만약 헌재가 딴짓하면 국민저항권을 발동해 한칼에 날려버리겠다”고 겁박했다. 또 다른 광장의 탄핵찬성파는 즉각 파면을 촉구하는 릴레이 집회를 열고 있다.
난장의 시작은 12·3 비상계엄이었다. “계몽령이었다”며 결과론적 합리화를 주장하든, “고기밥 될 뻔했다”고 상상의 디스토피아를 펼치든 질문은 이것이다. 12·3 계엄 선포가 헌법 질서를 해치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인가,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클 정도로 심각한 위배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 재판관 8인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파면 선고를 받았다.
대통령이 돌아왔다고 질문이 달라지진 않는다. 헌재를 향한 정치권의 각기 다른 압박은 소음에 불과하다. 헌재 담장 바깥에서 구호와 발 구르기가 아무리 거세도 답변이 달라지지 않는다. 박 전 대통령 전례와 법조계 의견을 감안하면 헌재는 이미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헌재의 시간은 끝나가고 다시 정치의 시간이 돌아오는 셈이다.
헌재 결정 이후 대한민국이 온존할지 묻는 이들이 많다. 8년 전 소수파에 그쳤던 탄핵 반대 시위대와 달리 지금 반탄 시위대는 찬탄 시위대에 버금가고 젊은 층 비중도 커졌다. 조직력과 금력이 과거 민노총이 주도한 촛불세력 못지않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탄핵이 인용되면 전쟁”이라고 했다. 계엄 이후 국가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경제, 외교안보 모두 비상인데 만일 유혈 폭력 사태라도 벌어진다면 끔찍한 일이다.
헌정 사상 첫 파면된 박 전 대통령은 승복 메시지를 내놓지 않고 사저로 돌아갔다.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아직은 절반의 승리”라며 세월호가 침몰한 팽목항을 찾았다. 그동안 깊어진 분열의 골은 민주당의 줄탄핵 사태와 12·3 계엄을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통령학 최고 권위자로 불렸던 고 프레드 그린슈타인 전 프린스턴대 교수가 광범위한 미 대통령 리더십 연구를 시작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중국과의 외교 수립 등 탁월한 업적을 세운 닉슨 대통령은 왜 스스로 정치적 파멸에 이르렀는가. 자신의 감정을 관리·통제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런 닉슨도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탄핵 위기 직전 사임하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난 수개월간의 비통과 분열을 과거사로 돌리고 공통의 이상을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통합을 호소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윤 대통령에 퇴로는 안 보인다. 그래도 아직은 ‘애국 시민’뿐 아니라 전체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 지도자다. 윤 대통령은 석방 후 대통령실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불필요한 논란이 없도록 절제된 대응을 주문했다고 한다. 헌재 결정 이전에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어떤 경우든 폭력은 없어야 하고, 어떤 결과든 승복해야 한다”는 입장이 나오길 기대한다. 돌아온 대통령의 임무는 대한민국을 온존케 하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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