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학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 약화 새 면모 드러내
소설가 1인칭으로 등장 글쓰기 고뇌와 한계도 묘사 “형식의 시도는 항상 사실적인 서사 앞에 굴복했으며, 나는 그것이 가장 고통스럽다.”(113쪽, ‘힌트는 도련님’ 중에서)
주로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을 그려온 소설가 백가흠(37)씨가 등단 10년을 맞아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세 번째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문학과지성사 펴냄)을 내놨다.
사실 백가흠씨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 같은 고백처럼 2005년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와 2007년 두 번째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에서 대체로 낭만성이 제거된 남성적 폭력성과 가학성을 핍진하게 그려왔다. 하지만 2007년 이후 문예지에 게재한 작품을 모은 이번 소설집에서 그는 남성적 폭력성을 상당히 약화하는 대신 사회적 존재감을 약탈당한 이들의 실존적 그늘을 건조하게 천착하는 새 면모를 보여준다.
소설집 수록 작품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소외된 사람들을 그린 단편 ‘그런, 근원’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 ‘통(痛)’ ‘쁘이거나 쯔이거나’ 등과, 일종의 ‘소설가 소설’인 ‘그래서’ ‘힌트는 도련님’ ‘P’ 등으로 대별된다.
‘그런, 근원’은 아버지가 사라지고 어머니마저 자신을 버리면서 파란만장한 삶으로 내던져진 연예기획사 매니저 ‘근원’이 죽어가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현재와 과거의 교차를 통해 잊혀졌던 인간적인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부활시켜 “소설적 정석의 글쓰기”(문학평론가 김윤식씨)를 보여준다는 평가다.
또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는 키가 150cm밖에 되지 않아 사회에서도 무시당하고 이혼까지 당한 정수기 영업사원을, ‘통(痛)’은 월남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원덕의 고통스러운 삶을 서늘하게 그린다. ‘쁘이거나 쯔이거나’도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시집 온 어린 베트남처녀 쯔이가 당하는 성적 착취를 담았다. 사회적 존재감을 박탈당한 이들의 자화상이라 할 만하다.
등단 10년째 접어들면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가 백가흠씨. 그는 “작가에게는 평생 쓸 수 있는 글의 양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며 “귀하게 평생 오랫동안 쓰고 싶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
“여전히 모더니스트인가 리얼리스트인가 하는 것. 구닥다리 같지만 왜 그것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인지, 쓰는 동안에는 왜 자꾸 상대적인 갈구만 남는 것인지 도통 모를 일이다”(114쪽, ‘힌트는 도련님’ 중에서)
또 자전적 소설이라는 ‘P’에서는 자전적 소설 쓰기가 얼마나 여러 겹의 욕망이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P는 1인칭 소설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자신이 쓴 자전소설을 두고 아내와 대화를 하기도 하고 편집자와 대화 도중 원고를 삭제해 버리기도 한다.
소설집의 첫 작품인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에선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두 실종 사건을 둘러싸고 소문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소문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괴물처럼 부풀려진 소문이 결국 소문 피해자를 자살로 몰고 가는 소문의 맹독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이번 소설집은 서사에서 형식으로 관심을 옮겨가는 백가흠씨의 이정표인지도 모른다. 그는 “작가는 이야기와 예술성을 놓고 늘 고민하게 된다”며 “나는 이야기에서 예술미학적인 면으로 옮겨가는 과정인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평론가 이광호씨는 “모든 치열한 예술가들이 그런한 것처럼, 내용에 대한 깊은 탐구 끝에서는 장르와 문법에 대한 날카로운 자의식이 탄생한다”며 “백가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소설 쓰기를 새로운 국면에 진입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