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위해 충성… 다수 차시 남기고 차인으로 이름 날려
대표적인 척화신이었던 두 형제 기려 석실서원 건립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의 차 문화는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과 빈곤에 빠지면서 전통의 단절과 함께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차 생활은 백성으로부터는 멀어져 갔다. 그 때문에 차 생활을 즐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대대로 벼슬을 하는 명문가이거나 훌륭한 선비가 나와서 가난하지만 차를 즐기는 형식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차 문화는 명문가나 훌륭한 선비를 통해 전승되고 연명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1598)이 끝난 지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또다시 북방 청나라로부터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1637)이 연이어 터졌다. 남쪽에서는 왜(倭)가, 북방에서는 만주족이 항상 침략을 넘보는 한반도는 바람 잘 날 없었다. 대륙에서는 명(明)나라의 세력이 쇠퇴하고 후에 청(淸)나라가 되는 후금(後金)이 욱일승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의 선비들은 명분론으로 명을 섬기고 후금을 푸대접하였으니 후금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명나라와 대륙의 종주를 놓고 한판 대결을 벌여야 하는 후금으로서는 조선을 일단 제압해 놓아야 했다.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의 세력 확장을 사실로 받아들인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가자 후금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는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했다. 후금 태종은 이에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전쟁의 결과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중국 대륙의 패자가 된 후금이 조선에 ‘신하의 의’를 강요하는 한편 군마와 식량 등 전쟁 물자를 강요하기에 이른다. 이에 조선이 불복하자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강화로 가지 못하고 급한 나머지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다. 신하들은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主戰派)로 나뉘었으나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때 척화파(斥和派)의 영수가 예조판서였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었다.
그는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경기 남양주시 덕소에 있는 김상헌 선생의 묘. 김상헌은 청나라에 끌려가며 ‘가노라 삼각산아/다시보자 한강수야…’시조를 지었다. |
그는 항상 바른소리를 하다가 반정 주체나 정권 실세로부터 모함을 받고 귀향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1611년(광해군3)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에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인조반정 후에도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의 마을 뒷산에는 문정공 김상헌 선생 묘와 그의 형 문충공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묘 등 안동김씨 묘가 흩어져 있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왕족을 호종하여 강화로 갔으나 강화가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자폭하였다.
당시 욱일승천하는 청나라의 대세를 읽지 못하고 명분에 얽매여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나라를 무시하여 화를 부른 것이 과연 잘 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두 형제가 나름대로 나라를 위해 충성한 것만은 사실이다.
김상용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그는 글씨를 잘썼고 차인으로도 이름이 나 있다. 그가 남긴 차시 몇 편은 차인으로서의 그를 느끼게 한다.
“산 동자 눈을 잔뜩 이고 샘물을 길어/ 돌솥에 불을 활활 피워 용단을 끓이네./ 솔바람소리 솔향기 뜰에 가득하고/ 한 사발의 차 마시니 순간 신선이 되네.”
“몽롱한 달빛 속에 배는 난저로 미끄러져 가고/ 비파 비스듬히 안은 소매에 바람 가득하네./ 맑은 강물을 길러 해차를 달이려 하니/ 원앙이 놀다 희미한 안개 너머로 사라지네.”
“늙어 세월 보내는 데는 책이 좋고/ 창자를 적시는 데는 한 잔의 차일세./ 사립문에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산골 승려가 고사리 들고 왔구려.”
“흰 갈포 사모 쓰고 몸 한가로워지니/ 작은 집에서 유유자적 세속과 멀리하네./ 수많은 책 속의 점대가 벗이 되고/ 한 사발 해차는 사랑하는 사람마냥 마음에 드네.”
김상헌도 형 못지않은 차인이다.
“초나라의 고아한 노래 다시 누가 화답할까/ 양원의 옛 부(賦)도 아련하네./ 쓸쓸히 혼자 앉아 차 달이니/ 시흥(詩興)이 멀리 파수(?水)의 동쪽에 이네.”
“늙어서 붓과 벼루는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찻잔과 술잔을 가까이함을 스스로 웃네.”
“미투리에 지팡이 짚고 숲속을 소요하고/ 쉴 때는 고요히 앉아 책을 읽고/ 향을 피우고 차를 마셨네./ 소리나 연희, 번잡한 유희를 가까이하지 않았네.”
김상헌은 청음(淸陰) 혹은 석실산인(石室山人)으로 불렸다. 두 형제는 석실서원에 배향되었다.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척화신이었던 두 형제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묘정비는 1672년(현종13)에 건립되었다.
경기 남양주시 석실서원(石室書院) 자리에서 바라본 한강 풍경. 옛 사람들은 이곳이 아름다운 호수 같다며 미호(渼湖)라고 불렀다. |
석실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서원이 헐리면서 묘정비만 현재의 자리(남양주시 수석동 산 2의 1)에 남아 있다. 세종 때 대제학을 지낸 조말생(趙末生) 신도비 부근에 ‘석실서원 터(石室書院址)’라고 쓰인 표석만 있다. 김상헌과 김상용의 묘는 당시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5리 석실마을로 옮겨졌다.
김상헌의 손자로 김수홍(金壽興·1626∼1690)·수항(壽恒·1629∼1689)이 있고, 수항의 아들 김창집(昌集) 창협(昌協) 창흡(金昌翕) 형제에 이르러 가문이 빛을 더했다.
당시 서원의 종장은 농암(農巖) 김창협, 삼연(三淵) 김창흡이었다. 기원(杞園) 어유봉, 성재(誠齋) 민이승, 지촌(芝村) 이희조, 송암(松巖) 이재형, 여호(黎湖) 박필주, 겸재(謙齋) 정선, 사천( ?川) 이병연, 도암(陶庵) 이재(李縡) 등이 문인이었다.
김창집의 손자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1702∼1772)이 석실서원의 꽃을 피웠다. 김원행은 노론과 소론의 당쟁으로 생부인 죽취(竹醉) 김제겸, 조부인 김창집 그리고 친형인 김성행(金省行)을 잃자(이것을 임인삼수옥(壬寅三手獄)이라고 한다), 도성을 떠난 후 단 한 발짝도 도성에 들여 놓지 않았다.
그는 석실서원에서 후학을 길렀다. 대곡(大谷) 김석문, 이재(?齋) 황윤석(黃胤錫),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여기에 포함됐다. 호락(湖洛)논쟁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노론 내에서 벌어진 것이다.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충청도 호론(湖論)과 이들이 같다고 주장하는 서울경기의 낙론(洛論) 사이에 격론이 심각하였다. 낙론(洛論)은 북학사상으로 연결되어 개화사상에 영향을, 호론(湖論)은 위정척사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김수흥도 훌륭한 차시를 남겼다. 벼슬은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기사환국 때 장기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숨졌다.
“복숭아꽃 필 무렵 실버들 가지 푸르고/ 때마침 강천에 해가 지고 있네./ 어디서 고깃배가 그물 걷어 돌아오나/ 숲속의 띠 집에는 다기(茶旗)가 나부끼네.”
“한가로운 구름과 날아드는 새는 같은 취향이고/ 담백한 식사에 하품의 차를 마시지만 편하게 지낸다네.”
김수항도 차시를 남겼다. 상복(喪服) 문제로 남인을 누르고 윤선도를 귀양 가게 한 서인이지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숙종 때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고 정권이 완전히 서인의 손에 돌아간 사건)으로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기사환국(己巳換局·숙종 때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 보냈다가 후에 사약(賜藥)을 내리는 등 서인들이 대거 조정에서 물러난 사건)으로 진도에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차시에 비해 역사는 항상 심란하다.
“고요한 뜰에 이지러진 달이 기울고/ 처마 밑을 홀로 거닐며 시를 읊네/ 역리가 말을 돌보는 소리 자자 들리고/ 부엌 사람은 차를 달일까 물어보네./ 아름다운 거리에 들리는 소리 밤을 부르는데/ 옥하에 흐르는 물 추위에 울고 있네./ 문 앞의 가까운 곳도 가기 어려운데/ 고향은 하늘 끝 멀리 있네.”
“숨어사는 사람은 벌레처럼 나다니지 않고/ 집안에 박혀 방 하나를 지킬 뿐이네./ 수레나 말 타지 않고 단아하게 살며/ 고요히 책 속에 깃들어 그 맛 즐기네./ 우물의 얼음 깨 차 달이고/ 처마에 햇볕 쬐어 등을 따뜻하게 하네./ 하필 털 담요나 방석이 있어야/ 찬 기운을 막을 수 있을까.”
한강이 팔당에서 덕소로 돌아오는 구비를 바라보고 있는 석실서원은 한강 경치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다. 팔당에서 덕소까지를 특히 미호(渼湖)라고 부른다. 아마도 아름답기 그지없고, 또 물길이 들어와 마치 호수처럼 고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문득 시 한 수가 떠올랐다. 역시 다시일미(茶詩一味)였다.
“석실서원 아침 햇살은 미호팔경(渼湖八景) 중 하나/ 서원은 간 곳 없고 표지석만 외롭다./ 할미꽃 두어 송이 백세에 향기를 전하느냐./ 호락(湖洛)의 진원지, 진경(眞景)의 산실/ 한때 작은 석실은 조선을 휘잡았거니./ 진경에서 북학, 또 실학에 이르기까지/ 미호(渼湖)라는 이름을 딴 출중한 선비는/ 임인삼수옥(壬寅三手獄) 후 석실 밖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도다./ (중략) 동서, 남북, 노소, 대북소북, 시파벽파/ 당쟁으로 잃은 인재 산더미를 이루네./ 차라리 안개에 모든 경계 사라지는/ 아름다운 호수 팔당에 혼을 담으려네.”(‘미호(渼湖)가 바라보이는 석실서원’)
차 연구가 류건집은 이렇게 말한다.
“몇 대를 이어오는 다풍은 생각만 해도 자연스럽고 우아하며 품위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학문을 닦아 당대를 누비던 주역이었으니 가르침의 힘이 크고, 더구나 차를 마셨기에 사람 사는 도리를 터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 심한 정쟁의 주역들이었다는 점에서 차 정신을 발휘한 것은 아닌 듯싶다”고 아쉬움을 토한다.
인간은 정치적으로 말려 들어가면 때로는 자신의 선택과 판단으로 삶을 운영하기보다 당파를 이루어 당파적 이익에 말려들기 쉽다. 차 정신이라는 것은 권력과는 먼 것이다. 도리어 권력에 있으면서도 권력을 견제하고 자신을 절제하고 다스릴 줄 아는 정신이야말로 차 정신일 것이다. 이들의 차 정신은 물론 매월당의 차정신이나 허균의 차 정신과는 다르다.
한국의 당파는 선비들의 삶의 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당파를 하지 않고는 출세를 할 수 없었고, 출세를 하면 또 당파에 말려들었으니 조선의 중후기 역사는 그야말로 당파의 연속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중에도 당파가 있었다. 당파로 인한 인재의 손실이 너무 큰 것이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선생도 당파에서 간신히 비켜 있었으며 다산은 당파의 한복판에서 15년 이상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웬만한 선비들은 모두 당파에 말려들었으니 이는 한국 선비문화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에 권력을 멀리하고도 안심입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풍류차, 청담차의 정신이 더 요구된다. 당파를 붕당정치라고 미화하는 이도 있지만 당파는 바로 주체적이지 못하고 사대주의가 문화주의로 통하는 한국 문화의 내홍이다.
한국 차문화의 전통도 제대로 수립되려면 바로 당파성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이다. 차는 나눔의 정신이고 함께 사는 정신이다. 초의의 차 정신이 중정(中正)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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