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레리나에게 백조의 호수 주인공을 맡는 건 특히 각별하다. 두 시간여 이뤄지는 공연 내내 고난도 기술을 쉬지 않고 구사해야 한다. 게다가 순수한 백조 ‘오데트’의 날갯짓을 선보이다 마성의 흑조 ‘오딜’로 표변하는 1인 2역도 소화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군무를 추는 무용수부터 시작하는 오랜 수련을 거쳐 정점에 오른 발레리나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백조의 호수 주역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또 워낙 대작이어서 백조의 호수 전막을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국내 발레단은 몇 안 되는 만큼 오데트를 맡을 수 있는 발레리나는 결국 우리나라에서 10명 안팎으로 손꼽힌다.

창단 35주년인 올해 첫 작품으로 백조의 호수를 5일 개막한 유니버설발레단의 솔리스트 한상이, 최지원이 그중 두 명이다. 최지원은 “발레리나에게는 백조의 호수가 유독 힘들다”며 “비교를 하자면 (다른 작품에 비해)3배 정도”라고 오데트 배역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오데트로 무대에 서는 건 처음인 한상이도 “그렇기 때문에 발레리나들이 다 하고 싶어하고, 꿈을 꾼다. 고2 때 콩쿠르에서 상 받고 한 인터뷰를 얼마 전 우연히 봤는데 그때 ‘세계 최고의 백조가 될래요’였다. ‘그때부터 백조를 꿈꿨는데 이제야 하는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두 발레리나를 만난 건 개막을 며칠 앞둔 늦은 오후. 오전 11시부터 다섯 시간 동안 진행된 연습을 마치고 인터뷰 장소로 온 이들은 ‘섬세한 연기’와 ‘지구력’을 까다롭기로 정평 난 오데트의 가장 큰 과제로 꼽았다. 최지원은 “어느 파트 테크닉이 특별히 어렵다기보다 팔을 움직여 큰 새인 백조의 날갯짓을 표현하는 게 가장 어렵다”며 “날갯짓처럼 보이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백조 움직임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상이는 “무용수로서 지구력이 가장 필요한 작품”이라며 “굉장한 스태미나가 필요하다. 주역이 소화해야 하는 춤의 양이 엄청나다”고 말했다.

애초 오데트·오딜은 1877년 초연 때부터 계속 두 명이 맡다 1895년 전설의 이탈리아 발레리나 피에리나 레냐니가 혼자 해내면서 1인 2역으로 굳어졌다. 빛과 어둠 같은 상반된 배역을 혼자 소화해내는 어려움은 2010년 영화 블랙스완에선 주인공 발레리나를 죽음으로 내모는 내면의 고통으로까지 묘사된 바 있다. 두 발레리나는 “영화가 과장된 면이 많다. 무용수들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며 오히려 1인 2역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재미를 찾는다고 설명했다. 한상이는 “저를 두고 백조가 더 어울린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연습하면서 내면의 흑조를 찾았다”며 “여리여리한 백조를 하는 것보다, 강하고 카리스마를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흑조를 연기하는 게 오히려 더 재밌다”고 말했다. 역시 백조가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듣는 최지원도 “어떤 모습으로 해야 더 흑조답게 보일까 끊임없이 생각했고 그 결과 ‘흑조 연기가 좋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게 더 기쁘고 큰 성취감을 준다”고 말했다.
무용계 엘리트 코스를 밟던 두 발레리나는 한창 시절에 은퇴를 고려할 만큼 중한 부상을 고통스러운 재활로 극복한 늦깎이 오데트·오딜이라는 공통점도 지닌다. 발등이 문제였던 한상이는 “회복·재발을 반복하느라 3년을 고생했다. 막판에는 1년쯤 쉬어야 했다”고 말했다. 고관절 부상이었던 최지원도 “의사는 ‘그만두라’ 했는데 ‘당신이 더 근력을 키우면 재기할 수 있다’는 재활치료사 말에 용기를 얻어 9개월 정도를 하루 너덧 시간씩 지루한 재활운동을 쉼 없이 하는 것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역으로서 연습도 주니어들과 달리 자신이 정한 목표와 싸우는 자기와의 싸움이어야 하는 이들의 일상은 ‘연습장-집’의 반복에 운동·마사지 등이 추가되는 정도다. 30대에 들어선 이들에게 ‘발레리나의 30대’란 질문을 했다. 한상이는 “딱 좋은 시기 같다. 무대 경험도 있고 그간 인생에서 얻은 경험과 감동을 기반으로 표현력도 많아졌다. 발레계에서 30대 중·후반이 전성기라는 의견도 있는데 단, 그게 몸이 뒷받침되어야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거 같다”고 말했다. 최지원도 “그간 경험이 쌓여 무대를 넓게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며 “사실 무용수 수명이 길지가 않은데 ‘30대’라는 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오히려 옛날보다 발레단에서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고 하루를 꽉 채워서 모든 걸 다 쏟아부으며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사진=하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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